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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황혼녘 백합의 뼈, 감상.

by UVRT 2013. 1. 12.



황혼녘 백합의 뼈

저자
온다 리쿠 지음
출판사
북폴리오 | 2007-05-0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언제나 백합향이 가득한 '마녀의 집'에서 다시 한번 펼쳐지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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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나무 아래에는 시체가 묻혀있다.

 

일본에서 유명한 괴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본 일본의 콘텐츠에서 낯설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말이다. 서브 컬쳐에서 주류인 말인지 정말 유명한 말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국화와 칼'만큼이나 일본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일본의 상(象)은 온다 리쿠의 소설에서 천천히, 위로 떠오른다.

 

사람들이 책을 보고 줄거리를 말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할 말이 없으니까. 전에 했던 말이니까. 그리고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은 좋은 글은 쓰기가 힘들다. 적어도 문예에 천재성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다독은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볼 수 있기에 중요하다. 다작은 자신의 한계를 할 수 있기에 필요하다. 다상량은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개척하는 데 사용한다. 책을 읽고, 어떠한 말도 못해서 줄거리 나부랑이나 지껄인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명확한 목적성을 지닌 줄거리는 상관 없다. 애당초 이 책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 줄거리란 매우 매력적인 요소임과 동시에, 이 책을 보지 않게 만드는 강력한 파괴요소다. 모든 내용을 다 알아버린 이야기를 당신은 돈을 주고 사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가?

 

소설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서사성, 즉 이야기다. 문체? 구성? 이런 것은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기 위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글이 어떤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목적도 없는 글쓰기는 할 말의 부재를 낳고 할 말이 없으면 결국 글은 빈약해져 아무런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 채 질려서 구석에 방치될 뿐이다. 목적성이 없다, 라는 목적을 위할 수도 있다. 순수하게 자신이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은 지속성을 가지기가 힘들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가장 순수한 독자의 모습일 것이다. 대신 당신은 꾸준히 리뷰를 쓰고, 글을 쓰는 사람을 부러워해서는 안된다. 당신은 꾸준함을 버리고 자유로운 즐거움을 택했으니까.

 

온다 리쿠의 소설은 100여권이 넘지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리즈를 꼽아야 한다면 「삼월은 붉은 구렁을」연작 일 것이다. 삼월에서 시작하는 이 연작은 「흑과 다의 환상」,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황혼녘 백합의 뼈」로 구성되며 소설 하나는 강력한 완결성을 가지고 있어서 굳이 순서대로 읽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학원 3부작 정도를 얹으면 사실상 온다 리쿠의 대표적인 소설은 거의 다 나오지 않았을까. 물론 당신이 「밤의 피크닉」, 「여섯번째 사요코」, 「구형의 계절」, 「도서실의 바다」를 보지 않았다고 해서 뭐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이런 건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자.

 

온 다 리쿠는 빛과 어둠을 명확하게 가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빛이 강렬할 수록 짙어지는 어둠과 모든 것을 가졌기에 가질 수 없는 무언의 결핍성에 대한 관찰과 묘사력이 매우 뛰어난 작가다. 그녀는 화려하고 화사한 것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산뜻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러한 빛과 어둠의 길항이 바로 온다 리쿠 소설 특유의 분위기로 구축되고 사실상 매번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세계는 익숙함과 나른함 그리고 기묘함과 거부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구축된 세계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관통하는 세계관 내에서 비슷하게 양가적 감정을 다루는 이 염상섭 또한 참고할 때 독자는 재미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꽃의 화려함 뒤에는 푸질러진 분뇨의 내음과 썩어가는 시체 한 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어둠이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르다는 것은 다른 세계를 가졌다는 것이니까. 리쿠를 사랑하는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객관적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주변에서 좋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는 삶의 부속품들을 가지고 우리의 삶은 조립되어졌다. 하지만 좋은 부품이 모였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이 되진 않는다. 조립이라는 과정 속에 흐려진 어둠은 아무런 설명조차 하지 않으며 좋은 것이 되기를 모든 부품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엄청난 강압 속에서 조금씩 삶은 비틀린다.

 

그렇게 우린 우리의 어둠을 바라보며 빛을 비아냥거린다. 빛 속에 감사하며 어둠에 일그러진 눈꼬리를 잡아 당겨 둥그렇게 만든다. 일그러진 가면처럼 우린 울면서 웃는 모습으로 서 있는 거울을 흘낏, 곁눈질 한다. 백합이 하얀 뼈다귀처럼 아름답게 피어 있다. 소복히 쌓인 삶의 흔적들은 죽음의 길에 예쁘게 모여 있고 무구한 아름다움이 폭발하듯 피어난다. 저 먼 곳에 있는 예정된 우리의 파멸이 너무나 아름다워 삶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차라리 불행했다면 지금 마음껏 비명지를 수 있을텐데. 다가오는 파멸의 윤곽이 너무 뚜렷해 나는 지금 있는 행복조차 믿을 수가 없다. 난 분명히 비참하게 버려지듯 죽을 게 분명하다. 나만 알겠지만 미래는 확실하다. 그렇기에 지금 행복에 나는 웃으며 빠작빠작 말라간다. 슬퍼할 수 조차 없는 나의 부유함에 찬사를 보낸다. 그렇게 삶에 졸아 붙는다. 그 속에 이 책이 들어 국물이 우러나고, 나도 들어서 국물이 배여든다. 맛은 좋겠지만, 역시나 나는 삶에 바글바글 삶기고 있다. 지금도. 바글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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