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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더 라이언, 감상.

by UVRT 2013. 5. 19.



더 라이언

저자
조세프 케셀 지음
출판사
문학마을 | 2010-08-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000만 독자를 사로잡은 불멸의 지성 조세프 케셀 대표작 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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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프랑스 작가가 썼지만 Yes24에서 영미소설로 분류되고 그걸 한국어로 번역한 걸 읽고 있는 나는 이제 슬슬 내가 무슨 나라의 소설을 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있어 예술의 국적을 따져보자는 건 어쩌면 굉장히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지만, 모두들 국적을 따지고 있다. 그 속에 아롱진 페이소스가 있다고 믿으면서.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를 언급했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 서린 아우라는 대체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내 생각에는 프랑스 같다. 프랑스의 아우라가 책을 감싸고 휘황하게 빛나고 있다. 이 책을 다른 복사본과 다른 심리적이고 심미적인 어떠한 기준점이 어디서 발생하여 어디로 흘러가는가를 고민해볼 때, 이것은 프랑스의 시원(始原)에서 유럽의 어딘가로 흘러가는 강줄기에 실린 책일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읽은지 한달 반이 넘어가는 것 같은, 아니 언제 읽은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유럽적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왜곡된 강렬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다. 작가는 단지 보고 적을 뿐이다. 그것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는 아무런 감흥이 존재하지 않는 거 같다. 그는 공감하는 것 같지만, 사실 어디에도 발을 들여놓고 있지 않다. 경이롭게 감탄할 따름이다. 트래커의 놀라운 기술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던 크리스 락은 아프리카의 위대함에 공감하고 감동한 것이 아니다. 신비가 아닌 신기함에 경탄을 했을 뿐이고 깊이 파고들려는 노력은 오히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소설을 프랑스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개인적으로 유럽권의 여러 소설-이라 적고 한권 정도-을 읽어보면서 각 나라가 가지는 독특한 표현 위치를 간략하게나마 생각해보면 영국은 분석적이고, 프랑스는 관찰적이다. 그리고 독일은 관조적이며 북유럽은 사색적이다. 이탈리아의 소박함과 화려함의 양가적인 모습과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 특유의 농밀한 분위기는 역시나 환경적이고 역사적인 배경, 그리고 인종적 특색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프랑스는 철저한 나를 중심으로, 나의 이야기를 펼쳐진다. 그들은 상대방을 보고 듣지만 이해하려 하지 않고 객체로서의 인식을 오히려 명확하게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화란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와 내가 어떻게 다른지를, 어디가 다른지를 확인하는 작업과도 같다.


자, 다시 소설로 돌아가자. 주인공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모두 듣는 진귀한 위치에 서게 된다. 문명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어머니, 완연한 자연인으로서 자라난 어린 딸, 그리고 그 자연인과 문명인의 경계에 서 있는 아버지로 이루어진 이 가족은 이미 하나의 축약된 유럽과 아프리카의 모습이다. 그들은 이방인이면서 현지민이고, 어울릴 수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이방인을 관찰하는 또다른 이방인이 있고, 나는 이제 그 이방인을 관찰하는 누군가가 된다. 철저히 떨어진,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깊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자연의 신비로움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날 것 그대로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NGO나 BBC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도 이미 입증되고 있다. 맨날 사자 나와서 얼룩말 잡고 코끼리 나와서 물 마시는 장면 밖에 없지만 나는, 나의 아버지는, 그리고 나의 조카는 그걸 30년이라는 세월을 공유하며 같이 보고 있다. 나의 아버지도 치타가 임팔라를 놓치는 걸 보았다. 나도 치타가 임팔라를 놓치는 걸 보았다. 내 조카도 지금 치타가 임팔라를 놓치는 걸 보며 아쉬워하고 있다. 그리고 잡으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잡아도, 잡지 못해도 누군가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연은 그렇다. 날것이 가지는 파괴력은 소설 속에서도 여전하다. 사자를 죽여도 괜찮다. 하지만 사자를 죽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항상 어떠한 선택을 강요받지만, 자연에서 그것은 생과 사를 가르는 한순간의 결정이다.


자연의 선택은 손익이 아닌 생사를 가른다.


그리고 우린 이제 그 생사를 지켜보는 한 그루 나무가 된다. 바라보고, 기억하거나 잊을 따름이다. 소녀는 언젠가 어른이 될 것이다. 이문세의 노래처럼 언젠가는 엄마 없이도, 아빠 없이도 혼자 잘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자와 뛰노는 아이에게 우린 사자가 위험하다고 해야 할까, 멋진 대자연의 경이로움이라 감탄해야 할까. 저 사자가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공격할 때 내 손에 들린 이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걸까. 과연 난생 처음보는 인간을 구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나와 적대하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몇십년을 함께 살아온 사자를 죽여야 하는 것일까? 정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자와 총이 상징하는 것이 그리고 마사이 족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한들 무슨 소용일까. 지금 중요한 것은 사자를 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사를 가르기 위해서. 이 소설은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방아쇠를 당길지 말지를 300페이지에 걸쳐서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결론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생과 사의 어느 지점에 나의 가치관과 나란 존재를 두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것. 그것 자체가 중요하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 나는 누구의 생에 손을 들고 누구의 죽음을 지지할 것인가. 극단적 기로에 서서 나는 누군가를 찰나의 순간이나마 지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선택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선택하는 행위 그 자체를 강요받는 시절이 언젠가 반드시 온다. 그리고 사람은 그 때 선택을 하기 위해 배우고, 자라며 생각하는 것이다. 선택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선택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는 남고, 기쁨도 남는다. 하지만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아마도 공허한 시간의 후회만이 남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논의를 되풀이하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제는 선택하라. 그럼으로 우리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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