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설. 미국 대중 소설. 이 단어면 설명이 끝나지 않는가 한다.
스티븐 킹이라던가, 시드니 샐던이라던가, 뭐 그런 쪽을 즐겁게 봤다면 이 책의 분위기에도 충분히 익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최신에 나왔다는 것이지만 그 궤는 같이한다. 물론 당신이 대중 소설을 상업적이라 비판한다면 그러니까 '다빈치 코드' 같은 책을
싸구려라 비난한다면-나처럼- 이 책도 충분히 비난할만 하다. 그러니 안 보는 게 좋지 않겠나. 그럼 적당히 여기쯤에서 끊고.
전에 쓴 '나와 카민스키'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리는 없지 싶은데, 일단 그런 걸 썼던 적이 있다. 아마도 200? 그 언저리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내용은 다르지만 말하고자 하는 건 비슷하다는 것이다. 인간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의 세계에서 대체 당신의 재능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연인가? 실력인가? 아니면 돈인가.
인생의 큰 그림을 그려보자. 작은 조각들을 조곤조곤 모으다보면 어느샌가 커다란 그림이 완성되는게 인생이지만, 일단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림 정도는 그려볼만 하지 않은가. 물론 대부분 실패한다. 인생은 항상 알 수 없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져서 어찌되건 불만투성이
속에 살아가게 되는 거다. 아무리 행복해도 그건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균열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인생은 예측불허가
아니겠는가.
대중소설에 큰 의미를 부여해봐야
의미가 없다. 예술성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예술성을 희생해서 재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걸 선택해야 한다. 잘 짜여진 긴장감
속에서 흘러가는 사건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자기 전에 한 권의 책을 봐야 한다면 나는 이 책을 선택하겠다. 다른
책은 너무 무거워서 가위 눌릴 것 같다.
문학은
예술성을 가진다. 모든 예술은 예술성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예술성에 심취해 대중성을 잊게 된다면, 아니 대중과 소통하는 길
자체가 없어진다면 예술은 그저 허망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이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예술적인 작품을 바로 만나
즐길 수 있단 말인가. 판타지는 대중소설이다. SF도 대중소설이고, 아이작 아시모프도 대중소설가다. 대체 그 빌어먹을 예술성이
뭐길래 대중소설이 대중과 유리되면서까지 추구해야 하는가.
김진명? 문학사에 남을 수 있는 작가는 아니라는 것정도는 대중도 잘 안다. 하지만 재밌으니까 읽는다. 예술은 유희고 그곳에서 무언가
재미와 쾌락을 얻어야 한다. 더욱 고급한, 그리고 더욱 현학적인 재미는 알아차리기에 어렵지만 눈치만 챈다면 형언할 수 없는
재미를 가져다 준다. 결국 예술성이라는 건 고도화된 재미추구이자 역사성을 지닌 상업성이다. 결국 재미가 없으면, 뭐든 안된다.
70년대에는 그런 게 재밌는 소설이었고, 50년대에는 이광수의 무정도 대중소설의 총아였다. 소설의 시작은 무엇인가. 패관잡기
아닌가.
너바나보다 상업적이라고 해서, 우린 지금
키스에게 예술성이 없다고 깔 수 있는가. 물론 나도 댄 브라운은 싫어한다. 그 사람이 상업적 소설을 쓰기 때문이 아니라,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최소한,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재밌다. 니들은 예술같은 판타지 존나 많이 써라. 나는 존나
재미있는 글줄 나부랑이나 끄적여서 돈이나 벌꺼다. 존나 재밌는 글줄 써서!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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