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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캐비닛, 감상.

by UVRT 2012. 7. 18.



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저자
김언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6-12-2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인류 최후의 혹은 인류 최초의 인간, 심토머172일 동안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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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내가 이 책을 읽은게 아마 07? 08년 즈음이지 싶은데, 여태까지 감상문을 쓴 줄 알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10년 쯤에 어라, 안썼었나. 이러면서 어딘가에 끄적였던 거 같은데 역시나 안써놨었다. 미친 게으름이란. 정말 그렇게나 재밌게 읽었으면서 난 왜 감상문을 쓰지 않았었을까. 도통 알 수가 없다.

책을 여는 순간 옴니버스의 축제가 펼쳐진다. 터질듯이 쏟아지는 이야기의 향연은 처음과 중간이 무한이 이어지면서 무한히 맞물린다. 중간 다음은 처음, 처음 다음은 중간, 그리고 다시 처음. 끝 없이 이어지는 이 폭발력은 매우 신선하다. 저 작은 철상자 속에 대체 뭐가 그리도 많이 들었는지 끊없이 이야기가 쏟아지고, 우리는 그뿐만인 세계에 취할 수 있다. 이야기가 이어질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 물론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을 이유도 없다. 마음대로 이합집산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군체처럼 꿈틀대는 이야기들은 하나 하나가 모두 이야기를 품고 있어 하나이자 여럿인 거대한 소설체를 형성한다. 이야기는 퍼즐처럼 이어지고 분해되고 흩어져서 사라지고, 어디선가 다시 나타난다.

서사의 파편은 튕겨져 하늘 높이 날고 있고, 이야기의 파편은 퍼득거리며 바다를 헤엄친다. 아마 여기에 있는 이야기 중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잡아서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책 한권 분량은 우스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꽉 눌려져서 얼음에 재워진 채 눈을 두리번거리며 기다리고 있다. 신선한 활어, 하지만 죽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먹을 때는 차가운 생명이 혀에 닿아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누군가 책장을 열고 폭 쌓인 먼지를 훅 불어준다면 이제 우리는 이야기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너와 나의 이야기.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 쓸데 없는 이야기, 필요 없는 이야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이야기들은 삶처럼 주욱 이렇게 보관되어 있다. 나와 너란 항상 이랬다. 어딘가에 알게 모르게 조용히 먼지만 켜켜히 쌓여가고 있다. 잊혀졌지만 기록되어 있고, 기록되었지만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다. 당장 내가 내일 죽어도 세상에 아무런 변화는 오지 않고, 내가 살아있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기록되어 어딘가에 처박혀져서 구르고 있다.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나와 너는 빅풋이나 불가사리와 다를게 없다. 있다는 소문도 있고 애매한 증거도 있고 믿어주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를 증명해주는 것은 등본과 같은 서류다. 서류가 존재해야만 나는 증명된다.

아마도 당신과 나 또한 이 캐비닛 안의 서류들처럼 저 먼 어딘가의 상자 속에 동여매어져 시간만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시발, 알라딘 새끼 더럽게 늦네. 라고 외치면서. 캐비닛은 세상이고, 이야기는 끝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계인이 곧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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