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 전에 천국은 정말 천국인가? 하나의 질문을 떠올리게 하며 이 책은 천국이라는 것을 묻고 있다. 문둥이-나병환자같은 대체어가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 이 단어가 가지는 감정적 느낌을 생각한다면 문둥이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로 대변되는 소록도와 건강인으로 대변되는 세계 간에 있어 어떤 곳이 천국이라 불릴만하고, 그곳은 과연 어때야만 천국이 될 수 있을까. 작지만 복잡하고, 깊이 가라앉아있던 그 문제에 대해 소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의 천국’이라고. 주류들이 정해버린 그 ‘천국’이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천국에 살면서, 목숨을 걸고 천국을 탈출하려 한다.
소설은 세상의 단면을 보여줘야 한다고 한다. 모방론적 견해에 따르면 소설은 세상 속에 있는 것을 쓰고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이 세상을 모방할 수 밖에 없다고도 한다. 그 말들 대로라면 이 소설도 분명 세상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섬이라는 축소된 곳에서, 문둥이로 대변되는 극단적인 자들에서,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싸는 수많은 것들과 그 안 쪽에 흐르고 있는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뭔가 보고 있어야 한다. 이 소설은 단순한 교훈이나 감동이 아닌 어떠한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체 이 소설은 끊임없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를 고민해봐도 결론은 이상하게 나고 있다. 천국은 없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내밀한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인지, 정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책을 덮고 나서 저릿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진실은 그것이었다.
천국은 없다.
어디에도 ‘나의 천국’은 없다. 천국이라 함은 모두가 행복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이 행복한 곳은 천국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만의 천국’은 있을 수 없다. 나는 모두가 될 수 없다. 적어도 천국이라 함은, 적어도 종교에서들 많이 말하는 지복(至福)의 세계일 터이다. 그곳에는 미움도 슬픔도 고통도 없으며 한없이 행복한 세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천국은 더더욱 없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들의 천국도 당연히 없다. 나와 남이 같은 상태라면 사람은 행복하지 못하다. 행복이란, 비교되어야 생겨나는 것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어야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나와 동등해지려는 시도를 막는다. 불행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막는게 아니다. 나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둥이들의 간척은 배척받는다. 문둥이들이 자신들과 동등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위협이다. 사람들은 그렇기에 문둥이들의 천국건설을 막는다.
이렇게 된다면 ‘당신들의 천국’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소설에서 모두 말했다. 당신들의 천국은 지옥과 같은 말이라고. 스스로 천국을 건설 한다 믿지만 그것을 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천국을 건설하는 사람은 노역에 고통 받고, 그것을 지휘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의 천국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천국을 건설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결국 누구의 천국도 아닌 곳을 사람들은 오늘도 추구하고 갈망한다. 그야말로 세상 그 자체이지 않는가. 소설처럼 이 세상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섬에 시설을 건설하던 초심과, 간척을 시작하는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 곳에 살아가면서 천국을 건설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은 당신들의 천국이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다.”
문둥이들의 문드러져 버린 그 한 마디를 가슴 깊숙이 찔러 넣기 위해서 이 소설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저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느직하게 글을 늘였다. 결국 문둥이들이 갈망하던 그 천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을 약속하던 사람들의 말도 상처를 비집고 들어온다.
“당신들의 손으로 당신들의 천국을.”
결국 그들의 마음은 성자(聖者)였을지도 모른다. 남을 위한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숭고하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지 못했다. 그런건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리고 당연히 그들을 위한 천국도 없었다.
소설은 천국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거듭 제시한다. 문둥이들을 통해, 조대령을 통해, 수많은 원장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묻고 있다.
“이 것을 하면-지으면- 정말 천국이 오는가.”
결국 천국은 오지 않았다. 소설이 끝날 때의 결혼식을 행복의 시작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다만 얄팍한 보상에 지나지 않는다. 건강인이라 하지만 그것은 사실 감춰진 섬주민이었고, 문둥이라 하지만 치료가 끝난 사람이었다. 완전하지 않은, 그리고 감춰진 진실은 그 결혼이 여태까지의 ‘가식된 천국’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결혼식 또한 결국 천국을 예고하는 것도 아니었고, 천국도 아니었다.
천국을 지으려는 자의 대표자인 조원장과 문둥이들의 대표자인 황노인은 그것을 알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 조원장의 축사는 슬프기까지 하다. 조원장은 결혼식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미래의 천국을 말한다.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만 천국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천국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분명히 있다. 다만 그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이고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엇을 경유하여 길이 뻗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천국으로 가는 길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 천국은 어디에도 없다. 당신들의 천국도, 우리들의 천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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