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형을 이제야 감상하게 되다니. 좀 애매모호하네요. 저는 진산 좋아합니다. 진산. 선 굵은 무협지-백인과 흑인이 나와서 총갈겨서 다 부수는 헐리우드 같은-도 좋습니다만 섬세하게 흘러내리는 무협지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섬세함이라 하면 사람의 情을 잘 다뤄야 하는 법. 파이로드까지는 안되더라도 사람 사이의 그 자그마한 흔들림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섬세한 걸 그린다는건 무리지요. 그리고 정말 좋은 작가는 그 섬세함이 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독자로서 아직 실력이 미천해서 행간을 읽고 그 의미를 얻을 정도가 아닌지라 행간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잘 쓴 글을 보고 있을 때면 행간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됩니다. 제가 정말 좋은 독자라면 분명히 좋은 작가를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아직도 좋은 작가와 좋지 않은 작가를 구별하는 건 애매하고 어렵네요.
어찌되건 이 무협은 대사형이 망해버리면 둘째사형이 얼마나 골치아픈지 알 수 있는 소설입니다. 하여간 집안에 잘난 놈 하나 있어서 편하게 놀고 먹나 했더니 그 놈이 나가떨어져버려서 내가 고생해야 하는데 이 제정신 아닌 아랫 놈들이 고생은 내가 다 하는데 계속 잘난 놈이랑 나랑 비교하는 아주 그지같은 상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입에 밥 넣어주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왜 괴롭히냐고. 니들이 나한테 해준게 뭔데, 대체. 그렇게 불만이면 니들끼리 살던가. 왜 나더러 지랄이야 지랄이. 씃. 그래도 가진게 죄라고. 사제들 거둬 먹이려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둘째사형의 노력이 진짜로 눈물겨운 소설입니다.
대사형도 아닌데 공연히 있다가 인생 말아먹히고 고생하는 꼴이 딱 우리 사는 꼴 같기도 하고, 남 이야기 같지 않네요. 옆에서는 지랄하지 사회에서는 쪼아대지 나는 덴나 귀찮지 만사 다 때려치고 나가리 놓고 싶은데 그래도 눈에 밟히는게 정이라고 버릴 수도 없고 이거 참.
대사형이라는 자리. 그리고 자리가 주는 고민과 책임감을 잘 표현해줍니다. 큰 사건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모든 것은 대사형이라면, 이라는 거대한 질문 속에서 행동이 결정되고 고뇌하게 됩니다. 사부가 없을 때의 대사형이란 단체의 수장이자 가정의 가장과도 같은 것이죠. 그런 자그마한, 하지만 한 곳의 長이 가지는 감정이 가장 잘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협지에 항상 나오는 대의(大義)나 명분(名分) 속에 매몰되어가는 한 인간을 섬세하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잃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은 무와 협을 논해야 하는 무협에서 어려운 길이지만 진산은 항상 그 길을 가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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