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 어감 참 좋지 않나. 사대주의건 외국문화중심주의건 간에
어쨌건 프랑스와 예술관련 어휘의 연결은 항상 세련된 느낌을 전해준다라는건 다른 사람들 이야기고 내 머리 속에서 프랑스는 맛간
소설을 줄기차게 뽑아내는 사람들이다. 기욤 뮈소처럼 개판같은 연애소설도 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만날 그놈의 되먹지 못한
음모론만 주구장창 늘어놓은 사람도 있지만 나는 프랑스 소설을 말할 때 항상 클래르 카스티용 같은 글이라고 말하고 싶다. 제정신
아닌 그런 모습, 완연한 예술적 혼돈. 그게 바로 프랑스가 아닌가.
이베리아 반도의 문학이 음란하다면 저 먼 남미는 음탕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프랑스의 야하다. 이 3가지의 느낌 차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누군가는 이 3가지가 모두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에스파냐의 열정적이고 파괴적인 사랑과 남미의 끈적하고
몽롱한 사랑, 그리고 프랑스의 깔끔하고 자기애적인 사랑은 분명히 다르고 그것을 함축적으로 말하는 단어는 저 것들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럼 이 소설은 대체 뭘까.
콩고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란 작가는 콩고의 이야기를 프랑스 말로 적었다. 이게 요즘 말하는 소위 디아스포라 문학인가? 인간의 언어는
사람을 형성하는 것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자의 사고는 프랑스어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콩고를 모르는가? 아닐 것이다. 콩고에서 태어난 그는 분명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는 다른 콩코의 본연전 감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콩고의 감성을 프랑스의 사고로 연마한 이 글은 어떤 글일까.
아마도 마방쿠의 글이라는 결론만이 날 것 같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소설의 요소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문체Style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런 문체가 좋다. 문체를 결정짓는 것은 작가라는 인간이지만,
인간을 결정짓는 것은 환경과 유전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콩고의 유전자를 지니고 프랑스의 환경 속에서 자라났으니 이 글은
마방쿠이다. 감성은 콩고이되 모습은 프랑스가 보인다. 마치 양복을 입은 우리처럼. 한국인이지만 우리는 양복을 입고 있고 양식을
먹고 양옥에 살아간다. 뚝배기가 아니라 스댕에 라면을 끓여먹는 느낌. 뭐가 더 맛있는지는 모르지만, 보기에는 분명히 다르다.
거칠고 적나라하며,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느낌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이 보석같은 글은 좋게 말한다면 정제이고 나쁘게 말한다면
가식이다. 가장 기본적인 곳에서 가장 많은 기교가 필요하다. 기술Skill은 단지 겉일 뿐 결코 시원Core에는 닿지 못한다.
카레를 먹는 인도사람과 카레를 먹는 영국사람, 그리고 카레를 먹는 일본사람과 카레를 먹는 한국사람. 모두는 모두의 카레에
닿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카레와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카레는 결국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의 카레에서 발원하여 지금
이 카레에 도달한다. 콩고의 물줄기는 프랑스의 땅을 적셔 새로운 포도주로 익어간다. 콩고의 모습이지만 나는 이 책에서 검은
사람들이 하얀 나라에 사는 느낌을 받는다. 콩고가 어떤 곳인지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알 방법도 없지만-표면의 콩고가
아닌 내면의 콩고는 말이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분명히 콩고다.
눈 앞에는 외상은 어림없지의 온갖 사진이 깔려져 있고 이제 이걸 합쳐서 이 아프리카의 술집을 상상하는 것은, 분명히 독자의 몫이다.
책과 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