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서 인물들의 이동은 그리 많지 않다. 기본적으로 한양에서
남한산성으로 내려와 그 움직임이 남한산성에 국한되어 성첩과 묘당을 오르내리는 것이 전부다. 그렇기에 나는 성 밖을 나갔던 서날쇠를
말하고 싶다. 이 남한산성을 빠져나가 유일하게 되돌아온 인물에 대해서 말이다.
서날쇠의 시작은 임금이 성에 들어오고 부터이다. 그는 임금이 들어오자마자 남문 북쪽 옹성 밑 배수구로 부인과 자식 둘을 조안으로
내보냈고 자신은 대장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있을 농성전을 대비한다. 그는 김상헌의 소개로 나루를 맡게 되고, 장면은
대장간의 뒷마당으로 향한다. 김상헌은 서날쇠와의 대화에서 그가 생각이 있는 자라는 것을 느끼고, 날쇠는 군역을 면제받고 대장간을
다시 운영하기 시작한다. 들로 나가 조총을 가르치고, 망가진 무기를 수리해서 성첩에 올렸다. 그는 실을 꼬고 대나무를 깎았으며
개를 잡아 사람들을 먹였다. 땔나무를 위해 톱을 만들어 수어청으로 보냈다. 서날쇠는 대장간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은 그의 손
끝에서 시작되었다. 날쇠는 산성을 지켰고, 백성을 먹였으며 키웠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그는 동쪽 벽의 배수구를 통해 격서를 들고 떠났다. 수수밭을 지나 마른 숲으로 들어가 능선을 따라 사라졌다.
그는 이배재 고개를 넘고 판교를 지나 천안에 다다를 것이다. 그리고 날쇠는 남한산성을 떠난다. 떠난 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남한산성에서 유일하게 돌아올 사람이 되기 위해, 그는 떠났다. 그리고 떠났던 동쪽 벽의 배수구로 새벽에야 돌아왔다. 임금의 글은
삼전도로 떠났다. 그는 돌아왔지만 이미 나라는 떠나버렸다. 날쇠가 위하던 나라는 없다. 당상과 당하, 묘당은 국치를 걱정하지만
날쇠는 걱정하지 않는다. 위(危)는 피할 뿐이고 물러나면 돌아올 뿐이다. 날쇠이자, 백성은 그런 것이다.
그는 안성, 평택, 수원, 오산, 입장, 천안을 거쳐 추풍령 아래 영동에서 몸을 돌려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길 없는 산 속에서
전라감사를 만났고 영동 구름재 아랫마을의 일을 전했다. 백성들은 변함이 없었고 언제나와 같았다. 오직 남한산성만이 외로이 고통받고
있었다. 관리는 힘들고 나라는 위태롭지만 백성은 변함이 없었다. 땅 위에서 그들은 여전히 태어나고 자라고 결혼하고 죽었다.
노인이 앞마당에 묻힌 것은 청병 탓이 아니었다.
강화도는 무너지고 이제는 임금이 삼전도로 떠났다. 조정은 남한산성을 나갔다. 청병이 온다는 소문이 남한산성으로 봄처럼 스며들었다.
서날쇠는 나루를 엎고 산성을 나갔다. 다가오면 물러난다. 실로 자연과 같다. 겨울에는 강이 얼고, 봄이 오면 강이 녹았다. 백성은
청병이 옴에 물러났고, 청볌이 감에 돌아왔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자 백성의 이치였다.
그가 다시 떠난 것은 동쪽 벽이었다. 거문 다리를 지나 검단산 남쪽 기슭을 돌아 강가 나루터에 도착한 그는 배를 고쳐 노를 저었다.
저녁 무렵 조안나루에 다달았다. 송파강은 녹아있었다. 청병이 떠난 뒤 그는 송파강을 거슬러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동쪽이 아닌 서문으로 들어와 행궁 뒷담길을 따라 대장간에 도착했다. 그가 묻은 독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화덕에 난 오소리 굴은
진흙으로 금방 막을 수 있었다. 대장간에 다시 불이 타오르고 그는 밭에 똥물을 뿌린다. 지난 봄과 같았다. 조정은 겨울과 함께
들어와 겨울과 함께 나갔다. 삼전도의 치욕은 묘당의 것이었다. 백성들에게는 다시 봄이 왔고, 서날쇠는 이제 다시 평범하지만 행복할
듯한 미래를 생각한다. 결국 날쇠는 백성이었고 백성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었다. 변하지 않았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나라는 중한
것이었지만 결국 세상은 백성의 것이었다. 버티는 것도 백성이었고, 살아가는 것도 백성이었다. 그리고 돌아와 다시 살아가는 것도
역시 백성이었다. 그야말로 자연이라는 말만 할 수 있었다. 그는 살아서 살았고 그에게 길은 항상 같은 곳에 있었다.
서늘할 정도로 섬세한 김훈의 글쓰기에서 가장 김훈의 문체를 잘 흡수하던 인물은 서날쇠였다. 서생금, 날쇠. 남한산성의 겨울은 너무
담담했고 김훈은 그것을 다시 너무나 투명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날쇠 또한 세상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물으면 답했고
일이 주어지면 해냈다. 너무나 초탈한 인물의 모습이 이상할 법도 한데, 김훈의 글에서 날쇠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천도(天道)는 무친(無親)이라. 그야말로 자연(自然)이다. 송파강은 녹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 남한산성에도 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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