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8년전 쯤 난 이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을 읽고 몇 시간 동안 토론도 했고, 하루종일 이 소설만 가지고 이야기를
했었다. 자의건 타의건 난 이 소설로 요시모토 바나나를 처음 알았고, 8년전 그 때부터 바나나의 팬이 되었다. 뜨겁게 햇살이
내리쬐던 4월의-3월이었는지도 모른다.- 햇살은 정말 사람 환장하게 만들었고 그에 비례해서 A4에 찍혀있던 검은 글자들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몽환적이고, 신비롭고, 어렵고, 이해할 수 없던 언어로 적혀있던 그 때의 키친을 난 지금도 기억한다. 그때부터
내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중요한 점은 내가 키친을 읽어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점이 생겼다.
8년 전에 읽은 키친과 지금 읽은 키친이 다르다. 완전히. 느낌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다른 글이다. 내가 지금 읽은 건
책이고 그 때 읽은 것은 프린트였으니 아마 그 때의 작품이 키친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읽은 모든 바나나의 작품과 다른
그 작품의 정체는 뭐였을까? 짧고, 발화문이 전무하며 어려웠다. 분위기는 매우 기묘하고 몽환적이며 편집증적인 강박증세가 보일
정도의 인물은 소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건 시간이 흘러 착각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완전히 다른 몇몇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난 그것으로 확신한다. 날 팬으로 만들었던 키친과 지금 내가 읽은 키친은 완전히 다른 소설이라고. 의혹만 깊어진다.
사실 바나나의 초기작 3개를 모아놓은지라 그 풋풋함과 허술함이 보인다. 아직 바나나만의 분위기를 만드는 능력을 문장들이 다
가지지 못했다. 전개는 뭔가 부족하다. 지금의 마술같은 노란 바나나가 아니다. 아직은 설고, 덜익어서 서걱거리지만 그 풀내와
싱싱함은 혀끝을 감돌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 덜 익었지만 충분히 달콤한 소설. 그래서 너무나도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 바나나의 처음이다.
반드시 사람이 죽는데도 미스터리가 아니고, 그 사람이 소설을 지배하지만 호러가 아니다.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데 로맨스가
아니다. 사람의 죽음은 날카롭게 벼려져 깊게 상처를 내버린다. 그 상처가 너무 쓰라려서 추억으로 싸매지만 여전히 붉은 눈물이
배여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그리고 우린 사람을 찾는다. 모두 사람을 찾아 헤메고 어디선가 찾아 상처를 핥는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어루만지는 상처는 언제 아물지는 몰라도 아프지 않다.
슬프지만 아프지 않다. 사랑하지 않지만 잊지 못한다. 그 사랑 때문에 슬프지만 아픔은 잊어간다. 그렇게 그렇게 사람을 우린
가슴에 묻고 그 추억으로 묘비를 세워 사랑을 추억한다. 더 이상 상처주지 않는 사랑이라 안타깝지만 상처투성이로 살아갈 만큼
사람은 강하지 못해서 아직도 기댈 곳을 찾고 사람을 찾고 사랑을 찾고.
그리고 난 바나나의 소설을 찾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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