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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숲의 왕, 감상.

by UVRT 2008. 10. 28.


숲의 왕

저자
김영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0-02-2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5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신화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복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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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앙. 제목이 간지나서 사놓고 보지를 않던 책이다. 솔직히 말해서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라 어느정도 퀄리티는 이미 보장되었다고 보는게 옳다. 달의 바다가 그랬고, 캐비닛도 그랬다. 재밌었다. 돈이 아깝지 않은 것. 적어도 영화 두편 보는 맛은 있었다. 아, 영화를 깎아 내리는게 아니다. 책은 혼자 보는 것이고, 거기에 온전히 내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두편의 값어치가 있었다.

실 제목만 보고는 당연히 뭐더라, 호랑이 이야기인 줄 알았다. 숲에서 왕이면 그게 호랑이지 뭐. 그런데 이건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아니었다. 환경 저널이었다. 그는 환경에 대해 논했고, 이 따위로 사람들이 살아가다간 망해버릴 거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공감이 되기도 한다. 갈수록 석유는 줄어들고 석탄까지 뽑아쓰고, 오존층은 뚫리고 대기권은 얇아지는데 빙하도 녹아내리고 여전히 투발루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라의 경제를 위해 눈을 가리고, 입을 다물로 귀를 막았다. 환경따위 알게 뭐냐, 뒈져버릴. 지속 가능한 개발은 역시나 탁상공론에 눈 가리고 아웅식의 헛소리다. 주가가 3자리를 달리고 환률이 1500으로 치솟는 이 마당에 환경을 위해서 경제를 천천히 발전시켜야 합니다, 라고 했다간 당장에 내 뺨을 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한다.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고.

REX NEMORENSIS. 이 한 줄로 모든 것은 설명 된다. 이제 비폭력 무저항의 순수는 없다. 그리고 합리적 대화도 없다. 개발과 환경은 이제 양립할 수 없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결국 환경은 제의를 올릴 수 밖에 없다. 꿈꾸는 이상을 위해 그들의 제사장은 한 없이 빌고, 빌고, 또 빈다. 이 세상을 버리고 갈 수 있게. 더 이상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원하지 않는다. 환경에 기대어 이 빌어먹을 난개발의 세상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어머니 대지는 이미 범해지고, 아버지 하늘은 죽었다. 내 부모가 죽었는데 대체 나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 책은 강하게 외치고 있다. 생명은 위대하다. 자연은 존엄하다. 하지만 대체 왜 빌어먹을 현대인이라는 종자들은 그런 것을 도저히 모르냐는 것이다. 자연을 살려야 한다고 주둥이를 나불대지만 그래놓고 자기 집이 그린벨트로 묶이면 씨발씨발 한다. 그래, 나도 우리 집 보호지역으로 묶이면 씨발거릴 것이다. 나도 속물에 현대인이니까.

든 자연은 결국 지켜오던 자에게로 돌아간다. 이 세상 석유가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수억 와트의 전기가 뿜어지지 않을 때, 우린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연은 자신을 모르는 자에게는 냉혹하다. 냉엄한 자연의 솎아내기 속에서 결국 지켜오던 자들만이 그 분노를 피하게 되고, 인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럴 때를 대비해서 자연을 사랑하자는 것은 아닌 것같 같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다 죽던지. 전부 자연에 패하던지. 둘 중 하나는 확실히 진실이고 그럴 때를 대비한다면 우린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안락함과 쾌락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락주의의 에피쿠로스는 깨달음의 큰 쾌락을 위해 먹고 사는 작은 쾌락들을 희생했다. 우리도 생존이라는 쾌락을 위해 약간의 불필요한 쾌락을 자제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언젠가 숲의 왕이 나타나 우리를 인도할 지도 모른다. 물론 그전에 이 빌어먹을 인류가 다 망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린 당당히

'살려주세요.'

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난 그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