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독일 소설이다.
그걸로 배경 설명은 끝났고, 이 책의 제목은 그야말로 정확하게 '나'와 카민스키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예술가 지망생에게
바친다. 카민스키가 말했듯이 명예와 탐욕에 찌들어 있는 우리들을 위한 글이다. 돈과 명예를 갈구하지만 그건 까놓고 우리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엄청난 발상은 있을지 몰라도 천재가 아니라 그걸 구현을 못하니까.
300
페이지도 안되는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카민스키라는 잊혀진 거장 비스무레한 예술가와 나만 알아보니까 나야말로 안목이 끝내주는
위대한 사람이고 세상이 미친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 허섭한 평론가의 모습에서 우리는 뭘 느낄 수 있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다. 이 3가지 시간대에 존재하는 나를 동시에 바라보면서 나는 씁쓰래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뻔히 알지만
이렇게 눈 앞에 들이대면 사실 당혹스럽지 않은가. 화내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웃어넘길 대범함 따윈 키운 적도 없다. 그러니까
씁쓰래하게 웃자. 자존심 상하긴 싫잖냐.
예술이라
는 걸로 빌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글자 나부랑이를 쪼물락 거리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담은 비웃음이 바로 이 책이다.
깎아내리고, 비웃고, 미쳐 돌아가는 이 삶에서 사실 우린 기억되지도 잊혀지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위대한 듯하지만 사실 이름을
말하면 누군지는 모른다. 마티스의 제자이자 피카소의 친구이다. 이야. 끝내주지 않는가.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 피카소가 극찬을
했다던 그의 그림도 그의 이름도 이제는 잊혀져서 사람들에게 말해봐야 누군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피카소라는 이름은 개나 소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림 좀 본다 싶은 사람들에게 마티스를 말해보라. 램프란트, 고야, 클램트, 드가, 고호, 고갱
그야말로 위대한 이름들이 아닌가! 그런데 램브란트의 친구나 클램트의 제자 같은 사람들은 혹시 기억하는가? 웃기고 있네.
예술과 평단의 부조리는 이미 모두들 질릴 때까지 알고 있다. 까놓고 위대한 작가 되는 기준 같은 건 아무도 모르지 싶다. 잘팔려서
위대한건지 위대해서 잘팔리는건지, 근데 위대한데도 안팔리는 놈은 있는건지. 그 전에 나 죽고 나서야 유명해지는 거면 그거 까놓고
운으로 되는 거 아닌가? 우연히 발굴해서 평단에서 잘난 척 해보고 싶은지라 이빨 좀 깠더니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거 아닌가?
그림이 좋아서 명성이 높은 것인가, 아니면 명성이 높아서 그림마저 대단해 보이는가?
거장의 졸작과 무명의 명작은 대체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 뒷 작품들이 모조리 망해버리면 위대함이 엿보이는 첫 작품도 망한 건가. 뒷
작품이 모조리 성공하면 초기작도 같이 성공하는 이 되먹지 못한 구조 속에서, 예술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예술인
뿐이게 되었다. 대체 일반인들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인과 예술은 무슨 의미인가? 그들만의 리그? 대체
어디에 고아함과 위대함이 있다는 말인가.
찌라시들
이 아무리 띄워주려고 해봐야 어차피 명작은 위대하니까 뜰까? 모든 언론이 까면 당연히 묻히지 않나? 자신의 안목에 병적 집착과
무한한 신뢰를 가지는 사람이 20년 쯤 지나서 먼지 쌓인 구석에서 발굴해낸 작품으로 굳건히 맞서 싸워 가치를 쟁취하는 것은 과연
그게 가치가 있어서일까, 가치가 쟁취당한 것일까?
장님처럼 그린 정상인의 그림은 위대한데, 그걸 장님이 그리면 별로가 되어버리는게 현실이다. 자, 이제 소설 속으로 돌아가보자.
카민스키는, 치매인가? 그는 눈이 정말 안 보이나? 아니 그 전에, 이 사람 아픈 건 맞을까? 눈이 보이지 않기에 얻은 명성은
눈이 보이니까 사라져버렸다. 칸트였나? 아우라Aura를 말한 것이. 아우라가 정녕 존재한다면, 까놓고 이 사람이 눈이 보이든 안
보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하지만, 카민스키는 눈이 보여서 결국 그저 그런 화가가 되어버렸다.
지랄 같은 예술의 병신같은 영속성을 통렬하게 비꼬면서, 그는 모든 예술인과 평단의 화두를 눈 앞에 까발린다. 과연 예술에는 진정한
가치라는게 존재하는가. 불멸의 가치가 있는가. 불변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는가. 모나리자를 보고 아름다움을 못 느끼는 놈은 정녕
병신인가, 아니면 세월이 흘러서 모나리자의 예술성이 사라지는 건가. 시발, 시간이 흘러서 가치가 재평가 되는 건 왜 꼭 무명의
작품이 유명해지는 경우 밖에 없는가? 난 단 한 번도 눈썹없는 아가씨가 끝내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럼 난 뭐하는
놈인가.
책을 주욱- 읽고, 고민이나 해보자. 예술에는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마지막으로, 기억되지 않는 예술가도 멋질 수 있을까? 책을 읽고나니까, 나는 대충 감이 온다. 대충. 진짜 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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