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브 디거'와
함께 꽤나 유명한 작품입니다. 약간은 어느정도 사회고발형식을 택하고 있으며, 일본의 판결체계, 혹은 일본의 사형제도 시행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다면 좀 더 빠른 이해를, 없다면 조금 난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의 경우는 일본의 재판 제도
자체를 비판하는 측면도 강하고, 사형제도의 헛점 자체를 논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차피 일본 내에서도 판결 체계에
관심이 없거나 사형 제도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은 많고 아무리 추리 소설이 장르 소설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갖춰야하는지라 책 내부에 찬찬히 설명은 잘 되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가석방을 통한 보호자 제도에 대한 것도 꽤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구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책이 대단하다, 혹은 멋진 내용이었다, 라는 것보다 왠지 모를 슬픔이었습니다. 아, 나의 시대가 흘러가고 있구나라는 기분이
강렬하게 들었습니다. 정신없이 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샌가 산 너머로 노을이 짙게 깔려있고, 골목 저 먼 곳에서는 저녁을 하는
음식 냄새가 흘러 나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끝이라 말한 사람도 없이 놀이가 멈추죠. 그 때 느낀 상실감, 아련함, 슬픔,
허망함 등이 이 책을 덮고 난 뒤에 몰아닥쳤습니다. 전 나이가 많지 않습니다만, 나이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 시대에서 제몫을
하는 인간의 나이에도 아직 미치지 못하고,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만 이제 한 시대의 종언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갑니다. 저는 엣 시대의 사람이고, 저의 시대는 곧 썰물처럼 빨려나가 바싹 마른 갯벌을 드러낼 것입니다.
홈즈와 루팡이, 멀어지네요.
반짝이는 재치를 지녔던 대단한 탐정들이 멀어집니다. 올드 스쿨 같은 탐정들의 시대가 저물어가는게 느껴집니다. 물론 저는 추리 소설을
많이 보지 않기에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홈즈의 색이 바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루팡이 늙어가는 기분이
들어요. 저 먼 곳에서 왓슨이 흐려집니다. 회색 뇌세포는 이제 일렁거리는 화면과 긁는듯한 잡음 너머로 전원이 내려가네요. 영원히
계속되는 위대한 영광의 시대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언젠가 스러지고 낡아버리겠죠. 예술은 불멸이나 시대는 유한합니다. 멀어진
저들의 추억이 제 탓은 아닙니다. 저들의 위대함이 제 위업이 아니듯이요. 하지만 저들이 멀어져가고 낡고 메마르고 부스러져 가는
시대의 끝자락이 느껴집니다. 가을 바람이 너무 에일듯이 파고듭니다. 제 탓도 제 덕분도 아니지만, 왠지 저는 저마저 바스라지는
기분이 듭니다. 아아, 나는 멀어지고 있구나. 시대의 위대한 창멸의 끝으로 걸어가는게 온 몸으로 느껴집니다.
시대의 종언, 같은 거창한 말을 해보고도 싶지만 아마 제 느낌일 뿐이라 벌써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을 읽고 그런 낮과 밤이 뒤바뀌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처음으로 부는 밤바람. 산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땅거미. 죄어오는
새파란 별빛. 아마도 이 소설이 그 정도로 재밌다는 것이겠죠. 이 책을 덮었을 때 제 표정이 상상이 갑니다. 아마 이 정도라면
홈즈와 루팡일 밀려나도 할 말이 없다고 쓴 웃음을 짓고 있었겠죠. 입으로 작가의 실력에 대한 칭송의 욕설을 내뱉으면서 등줄기로
지나가는 알 수 없는 번쩍임을 느꼈을 겁니다. 모든 좋은 책은 그런 기분을 전해주니까요.
'그레이브 디거'를 사야겠습니다. 이 정도의 책을 쓴 사람이라면, 전 그의 음습함에 빠져 죽어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세요. 이 책에는 모든 걸 해결해줄 위대한 탐정도, 당신을 구해줄 신묘한 도둑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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