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제목이 낯익은
사람도 있을 터이다. 그건 당신이 성석제의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를 봤기 때문이고, 이 책은 그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애당초 원제와 역제의 차이를 볼 때 저 제목을 뽑아낸 분은 성석제의 책을 염두에 두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성석제의 구라와
이 책의 이야기들은 그 궤를 달리하는 게 확실하다. 그걸 구라고, 이건 현실이다. 수많은 편돌이, 편순이가 존재하는 이 대한의
반도에서 우린 무엇을 꿈꿔야 하는가. 그 전에 편돌이, 편순이가 크게 자라나면 뭐가 되나요.
대형 마트 캐셔가 되나? 시발. 이런 병신같은. 저런 거 되려고 열심히 인생을 산 건 아니잖아요. 아니 인생을 열심히 사는 건
좋은데 사실 우리의 꿈이 슈퍼마켓의 매니저도 아닌 대형 마트 비정규 직원은 아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캐셔의 삶은
쓰레기인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만화에 나온 농담처럼 '인생 토너먼트 탈락자'들의 집합인가. 과연 그 런 싸구려 직장에서
일하는 하찮은 사람들은 우리보다 천하고 업신여겨져야 할, 그런 필연적 이유가 존재하는 사람들일까요.
과연 그들은 우리 안에 있을까요? 전 이 책에서 그들을 발견했고, 저 또한 그들과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윗사람에게
깨지고, 아랫사람에게 치이고, 옆 사람들에게 욕먹으면서 하루 하루 이놈 저놈 욕하고 또 헤살스러운 칭찬에 웃고는 집에 가서 물 한
잔 마시고 생각하겠죠.
"그래도 꽤 괜찮은 하루였네."
인생은 절망적일 수 있겠죠. 심각하게 절망적일 수도 있고. 존나 시발 좆같이 절망적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당신이 처하는 상황은
남들도 비슷하게 당하고 있습니다. 그 때 절망하느냐, 안 하느냐는 당신의 선택이죠. 절망은 선택이고 당신이 결정하는 겁니다.
상황은 단지, 상황일 뿐입니다. 고까운 위로를 하지도 않고 멋진 인생론이 담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슈퍼마켓, 그러니까 대형
마트에서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과 행복을 주는게 대체 뭐냐는 거죠. 사과가 예쁘게 쌓이면 행복해지죠. 과일을 나르면서 한 개
정도는 슬쩍 먹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바닥이 깨끗하면 즐겁고, 도둑을 발견하면 짜증납니다.
그리고 회사는 더 짜증나죠. 돈에 의해 평가받는 내가 슬프고, 나한테 고민을 털어놓는 놈들은 귀찮습니다. 어중삥삥하게 어쭈구리
앉아있는 겁니다. 이 도시의 어딘간에. 그리고 이 슈퍼마켓의 코너 구석에서 흔히 보이는 당신의 등은 굽어있고 어깨는 축 처져
있네요. 하지만 입은 웃어야죠. 고객에게는 스마일~. 지금 두부를 장바구니에 넣는 저나 신선 식품을 체크하는 당신이나 똑같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게 분명합니다. 돈이 없어서 두부나 씹어야 하는 제 인생도 쭈구리하고 이딴 곳에서 미나리 잎이 시든 걸 체크하고
있는 당신도 쭈구리하잖아요?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태어날 때부터 신선하지 않은 깻잎과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걸러내는 일을
하고 싶어하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과연 그 일을 할 바엔 죽어버릴 수 있는 강단있는 사람은 또 누구일까요. 적어도 전
아니고, 당신도 아마 아닐 확률이 높을 겁니다.
그래서 이 곳에는 인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당도한 이 길에 의미조차 없다면 아마도 굉장히 슬플겁니다. 다들 쭈구리고
앉은 이 코너에 쌓인 양파의 껍질에 반짝이는 영롱한 영혼의 이슬이 있을 겁니다. 라고 사기를 치지는 않는게 이 책의 좋은
점이죠. 욕먹을 놈은 욕을 먹어야 하고, 짤릴 놈은 짤려야 합니다. 그리고 편들어주고 싶어도 그 때 내가 짤린다면, 별 수 없죠.
슬프지만 모른 척 할 수 밖에.
하지만 가끔은
각오하고 일을 저지르는게 사람입니다. 그걸 꼬투리 잡은 윗사람과 경영진 덕분에 육개월을 고생하면서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더라도 그
때는 인생이 참 반짝거려 보이죠. 네. 그래요. 인생은 순간 순간이 빛나고, 그림자가 지고, 축축해지고 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신선 코너를 맡았다고 해서 내가 신선한 건 아니고, 빵을 진열한다고 해서 내가 빵집 주인이 된 건 아니겠죠. 사과를 예쁘게 쌓아도
결국 무너집니다. 버려야 하구요. 내가 하는 것과 내가 가진 것, 그리고 내가 누릴 수 있는 건 항상 달라요. 그러니까 인생은
경험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항상 다르잖아요, 항상.
커다란 대형 마트에 가보세요.
시든 깻잎과 건강하지 않은 미나리의 가치를 고민해보세요.
사과가 쌓인 모양에서 인생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신선 정육 코너와 유제품 코너 중에 어떤 곳이 당신의 인생과 이 세상에 더 유용할까요.
왜 두부는 도토리묵보다 한 단 아래에서 팔고 있을까요.
사실 여러분과 제 인생이라는 것도 저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음, 말을 다시 하죠. 딱 저정도에요. 우리 모두는. 그러니까 고민하고, 고민하지 마세요. 인생의 의미는 그런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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