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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파리의 포도주, 감상.

by UVRT 2012. 9. 20.



파리의 포도주

저자
마르셀 에메 지음
출판사
작가정신 | 2006-12-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민작가라 불리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집.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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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가로지른다. 전쟁의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아직 아픔은 생생하다. 한국인에게 있어 일제강점기는 피할 수 없는 기억일 것이고, 6.25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나 같은 아이는 IMF를 잊을 수 없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인간은 오직 홀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내일 당장 친구가 떠나갔고, 죽어가고, 사라졌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고, 공허한 위로만 해줄 수 있었다. 홀로 사는 시대였다.

그리고 아마 유럽사람들에게 있어 2차 대전은 그런 시대였을 것이다. 무기력함을 바닥까지 체험하는 시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노골적으로 듣고, 경험하는 시대다. 자신이 잘못해서도 아니고, 누군가 나를 괴롭혀서도 아니다. 시대가 나에게 패배를 강요하고, 고통을 선사했다. 물론 독일 사람들에게 2차 대전은 다른 의미를 지니겠지만, 마르셀 에메는 프랑스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는 유명하고, 그 또한 유명했다. 이런 처절하고 슬픈 시대에 에메와 같은 풍자와 환상 기법을 사용하는 작가는 대체 어찌해야 할까. 시대를 말해야 할까? 시대에 등돌려야 할까. 이 평화로운 시기에도 나는 리얼리즘과 판타지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시대의 아픔이 드러나지 않는 골목길에서 방황하고, 혼란스럽다. 나는 시대를 말해야 하는가, 나를 말해야 하는가. 대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기에 에메의 이 책은 귀중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 고민하는 나에게, 너에게. 나보다 더 큰 절망을 경험했을 그의 정직한 돌파는 그야말로 고결하다. 나는 물론 그처럼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대의 절망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책에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혁명도 항쟁도 투쟁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시대가 아파하는 것에 귀기울여 본 적도 없고, 지금도 내 자신만 귀중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알 수가 있다. 사랑, 우정, 정의, 법보다 돈과 내 가족이 우선이 되는 삶. 욕망에 충실한 자가 더욱 행복하게 사는 곳.

아마도 우리 모두는 지금 배부르고 몸이 따뜻하기에 이 글을 보면서 사람들을 비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당장 내일의 식사를 걱정하지 않고, 오늘의 생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는게 차라리 더 낫다는 지옥같은 현실을 경험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3자의 입장에서 나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사람은 끊없이 죽어나가지만 나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 그리고 입에 발린 인권이니 존엄을 혀 끝에서 농락하고 있다. 나는 당장 나를 쏜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을 나눠 줄 수 있을까. 내게 칼을 들이 댄 강도의 가난에 슬퍼할 수 있을까. 내 돈을 훔쳐간 도둑의 절박함에 마음 아파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모두 내가 안전하기에 나오는 가식이다. 당장 내가 가난의 바닥에 버려진다면 나는 훔치고 빼앗고 죽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럴 힘도 없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놓고 지금은 태연하게 높은 가치에 대해 글줄이나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힘들 수록 희망을 가지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버리면 안된다고 주절댄다. 비참하고, 또 비참하다.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그러한 시대에 대해서 비겁하게 안전에 도사리고 앉아 남을 비난하고, 응원한다. 나는 비겁자다.

이 책은 시대에 있어서는 유머였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법을 어기고 사람 하나 정도는 자연스럽게 죽일 수 있던 그 시대에 있어서 이 것은 유머일지도 모른다. 나도 지금 당장 그러고 사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고 극한 속에 멀어져 간 인간성을 부른다. 저 먼 안전이라는 음침함 속에 웅크리고 앉은 나의 메마른 눈동자에 현실을 들이댄다. 너의 혀 끝으로 간사하게 언급하던 인권을 지금 한 번 말해보라고.

나는 말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이 두렵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 간사한 혀를 잘라내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