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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

유쾌한 하녀 마리사, 감상.

by UVRT 2011. 7. 8.



유쾌한 하녀 마리사

저자
천명관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1-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 시대의 이야기꾼 천명관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출...
가격비교


 뭔가 격식을 따져가면서 그럴듯하게 써보려고 무단히도 노력했지만, 포기했다. 그리고 뭔가 분석을 하거나 인용을 하는 것도 포기했다. 사실 아직도 이 소설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무얼 말하든 모두 잘못된 말을 할 것 같아서 무섭다. 그래서 결국 이 글은 길고 긴 감상문이 될 것 같다.
 
 천명관은 어떤 사람인가. 그를 말하려면 「고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싶지만 결국 「고래」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작가, 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정도로 전작은 강렬했고, 너무나도 그 그림자가 짙었다. 사실 최근 두달 사이에 천명관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대해서 2개의 글을 쓴 적이 있다. 하나는 너무 천명관을 찬양하고 있었고, 유사점을 찾았으되 파고들지 못했다. 하나는 애당초 논점 자체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너무 「고래」를 신경 썼다. 내가 감명을 받은 글이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아니라 「고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는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재미가 없었다. 이걸 말할 수가 없었던게 문제였던 것 같다. 일단, 나는 이 책이 재미 없었다는 걸 전제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설들은 굉장히 무난하다, 뭔가 재밌는데 일상적이고 이상하지만, 평범하다. 조화로운 사건들이 모여서 부조화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천명관의 글쓰기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준 것처럼, 천명관의 이야기는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정말로 일어날 때의 유쾌함이다.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우리는 항상 바라마지않지만 사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일들은 사실 굉장히 사소한 일들이다.
 
 
 ‘내일 도로가 막혀서 선생님이 안 오셨으면.’
 ‘비가 와서 운동회를 하지 않았으면.’
 ‘~ 해서 ~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일들을 생각하는게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일까지 신경을 쓴다면, 아마도 사람은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천명관은 그런 일상의 무신경함을 짚어서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항상 생각하고 있지만, 무시하고 살던 일상의 단편을 뽑아내서 글로 쓴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곧 천명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독자는 기묘한 낯설음을 글에서 느끼게 된다. 남의 것이자 내 것인 이야기. 일단 천명관의 글을 저렇게 생각하자.
 
 그렇다면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어떤 곳에 있는 이야기 일까. 내 이야기도 아니고, 천명관의 이야기도 아니다. 위치는 아마도 한 건물 건너 사는 옆집 2층 정도가 아닐까. 이 책은 그 정도의 거리감을 지니고 있다. 내 바로 옆집에 노란 머리 외국인이 있지는 않지만, 한 집 건너 정도면 왠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인다. 안 보여서 그렇지 사실 우리 주변에 외국인은 굉장히 가까이 있으니까. 물론 요한나의 저택은 없지만, 우리 동네에 하나 정도는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동네 아주머니와 나 사이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 거리감은 소설과 독자의 거리다. 한번 정도 들어보았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아줌마들이 슈퍼가는 길에 만나서 쑥덕거리는 수 많은 ‘그 얘기 들어 봤어요?’의 그 얘기가 바로 ‘유쾌한 하녀 마리사’다. 천명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머, 그 얘기 들어봤어요? 요한나네 남편이 바람났다가 들켜서 자살했다는 말?”
 
 
 그리고 독자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로?”
 
 
 이 상투적인 문답이 소설을 읽기 전에 오가는 것이 바로 천명관 소설 읽기에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문답이 오가야지만 천명관의 세계는 이뤄진다. 세상 모든 이야기를 긁어모아 마구잡이로 이야기하지만 어쨌건 재미난 ‘패관의 잡설’같은 세계가 말이다. 그리고 일단 독자는 요한나네에서 남편이 죽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제, 준비를 하고 듣기 시작하면 된다.
 
 일단 이 글을 처음 대하면 고민을 해야 한다. 대체 왜 이 글은 편지글일까. 편지를 쓴 것은 요한나인가, 요한나를 가장한 천명관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제 3자인가. 굳이 요한나는 편지를 써야 하는가. 뒷 부분에 가면 편지가 아닌 부분도 있지만 그건 정말 일부에 불과하다. 분량상 말이다. 결국 이 소설을 알기 위해서라면 편지글인 당위성을 찾아야 한다. 왜 편지글인가에 대해서 모르겠다면 역으로 짚어보자. 만약 시작이 편지글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어땠을까?
 
 만약 편지글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어떻게 시작하는게 좋았을까? 요한나의 독백이나 의식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하고, 요한나의 성격을 생각해볼 때 굉장히 두서가 없고, 격정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순서를 지닐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편지글에서도 몇 번이나 이상한 곳으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요한나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방법은 좋지 않다. 그럼 시간 순서대로 요한나를 관찰하는 방식은 어땠을까.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이 아닌 순수하게 그녀가 말한 순서대로 천천히 사건을 나열하면서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3인칭으로 한다면, 뭔가 이상하다. 요한나의 마음 속 증오와 부글거리는 역동성이 드러나야 하는데 관찰을 해서는 그럴 수 없다. 편지글을 되새겨보면 그녀는 겉으로는 굉장히 침착했던 것 같다. 남편과 전생 문제로 싸웠을 때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1인칭 주인공은 어떨까. 무리다. 앞서 말한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결국 동일한 문제점을 안고 있을 뿐이다.
 
 자, 그렇다면 편지글이 되어서 이 소설은 어떠한 것을 얻었을까. 사건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이야기로 구성할 수 있었고 그녀의 내면 감정 또한 잘 표현할 수 있었다. 결국 편지는 이 소설이 소설이 될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구성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적어도 이야기가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중심이 있어야 하고, 최소한도의 사건 정리가 필요하다. 의도적으로 독자의 이해를 흩어놓을 요량이 아니라면, 소설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배려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천명관은 독자가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사건을 정리하여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것이 편지글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편지는 글이기 때문에 쓰면서 정리를 할 수도 있고, 너무 이야기가 엇나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편지라는 매체가 가지는 사적이고 은밀한 느낌은 우리에게 이 이야기가 ‘동네의 소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하므로, 천명관의 세계에서 가장 격정적인 사건인 살인을 다루기 위해서는 편지가 가장 적당한 것이다.
 
 물론 다른 소설들은 편지글을 채용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유쾌한 하녀 마리사’처럼 격럴한 감정의 폭발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이글거리는 질투심 같이 ‘쎈’ 것이 없다. 그나마 ‘세일링’에서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이 요한나의 감정에 가장 근접하는데 문제는 이 부부는 너무나도 건조한 권태기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비슷한 감정의 흐름이지만 요한나와 다르게 ‘세일링’은 독약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가지 않는다. 그리고 냉정함이 가미된 인물은 심리를 따라가면 충분할 뿐이다. 요한나처럼 길을 잃고 이야기 자체를 마구잡이로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편지글은 요한나가 너무나도 격정적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즉 인물이 그러하기 때문에 이 글은 편지글로 쓸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인물을 살리고, 소설을 유지하는 방법이니까.
 
 편지는 흐르고 흘러서 온갖 사소한 꼬투리를 다 찾아내기 시작한다. 저번에 싸웠던 것, 평소에 했던 말,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 등 모두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겪었을 법한 일들을 자연스럽게 천명관은 이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남자가 바라보는 화난 여자의 심리와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남자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여자가 화나면 이렇지, 뭐.”
 
 
 여자친구와 한번이라도 싸워 본 적이 있는, 아니 여자와 한번이라도 싸워본 적이 있는 남자라면 모두 공감할 내용이다. 대체 언제적 일인 데 그걸 끌고 와서 지금 일에 끼워맞추는 건지 알 수도 없는데, 아귀가 딱딱 잘도 맞는다. 아무 생각없이 한 말과 행동들과 약속들이 모두 지금 오늘의 이 실수를 위해 예비된 것처럼 여자는 모든 일들을 근거로 사용해가면서 지금 나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나의 잘못을 맹렬하게 비난한다. 그리고 남자는 그 모습에 황당해하면서도, 내심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왠지 맞는 것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 논리로 여자는 남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남자는 네 말이 맞다면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버리게 된다. 5년 전에 한 말과 3년 전에 한 행동, 그리고 한달 전에 한 약속과 어제 내가 잘못한 일들이 모두 하나로 이어지면서 여자의 논리는 정당화되고 나는 오늘을 위한 단서를 이미 몇 년 전부터 흘리고 다니던 나쁜 놈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요한나의 의심이다.
 
 분명히 어디선가 많이 보던 추리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추리 자체의 비약성과 요상함에 질려서 ‘어이가 없네.’라는 감상 밖에 할 수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이건 너무나도 전형적인 여자의 추리방식이었다. 과거의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가 된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는 결국 현재의 일로 과거를 끼워 맞춘 것 뿐이다. 그 때나는 그런 말만 한 것이 아니고 그런 행동만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든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가 딱 맞는 사건만을 콕콕 짚어서 이야기한다. 과거가 원인이 아닌, 현재가 원인이 되어 과거를 결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혼란이 온다. 사실 모든 의심은 그렇다. 지금 이게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과거를 소급해 원인을 만들어낸다. 원인 때문에 결과인 ‘의심’이 생기는게 아니라 의심이 생겼기 때문에 원인을 ‘조합’하는 것이다. 선후가 뒤바뀐 이 묘한 논리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일상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딱히 고민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의심할 때 저 방법을 쓰고 있으니까. 의식하지 않는 이상함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에서 제시된 방식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말은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한데?”
 
 
 소설도 그렇다. 말은 맞는데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그 방식이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방식이라서 여자도, 남자도 모르고 지나간다. 화나면 항상 쓰던 논리이고, 항상 당하던 논리이기 때문에 그 익숙함이 요한나의 추리가 당연하다고 최면을 걸고 있다. 분명히 이상함에도 말이다. 분명히 이상하다. 시작부터 이상하지 않은가.
 
 
 브루노와 통화를 끝냈을 때 나는 뭔가 후추씨처럼 작지만 독성이 강한 어떤 물질이 나의 마음속에 던져진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 작은 물질은 하루 종일 나의 생각을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았죠. 나는 그게 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애를 썼어요. (p.48)
 
 
 사실 이 말을 처음 보자마자 난 생각했다. ‘어쩌라고?’ 나라면 브루노의 통화를 그냥 으레 하는 농담정도로 여겼을 것 같은데 그녀는 일단 거기부터 의심을 시작한다. 시작은 그냥 후추씨. 그냥 의심이 들었다는 거다. 여기 자체에 큰 근거는 없다. 그냥 지나가도 무방하고, 질 낮은 농담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브루노는 그 정도로 친한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의심한다. 물론 의심을 할 구석도 매우 많았다. 즉 그녀와 브루노의 통화는 ‘의심할 수도 있고’, ‘의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내용들로만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의심해야지만 소설이 진행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속에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리고 그녀가 의심을 하기 시작하고, 이제 앞의 논리대로 이야기는 끼워 맞춰진다. 남편의 평소 행동, 전에 했던 전생에 대한 싸움, 남편에게 소개시켜줬던 여동생 등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지금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증거에 부합되는 근거들만 추려서 그녀는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즉, 그녀는 이미 ‘남편은 외도를 하고 있다.’라는 결과를 내어놓고 이제 과거에서 원인들을 끌어오고 있는 것이다. 아마 남편과 좋았던 기억도 있을 것이고, 남편이 다정하게 대해준 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동생에게 쌀쌀맞게 대하거나 별 관심이 없는 행동을 취한 적도 많은 것이다. 하지만 요한나는 그런 모든 사실은 제거하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선별하여 조립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마음은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 여동생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결국 이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온갖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온갖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이로써 소설은 선후관계와 인과관계가 뒤꼬이면서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일상이 가지는 기묘함’을 천명관은 소설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비록 아무런 연관도 없고 또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숨어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작가가 하는 일이란 특별한 게 아니고 그저 어떤 사물이나 사건 안에 내재해 있는 순서를 찾아내고 그 과정을 진술하는 일이라고요. (pp.45~46)
 
 
 이 말이야말로 이 소설을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말이 아닐까. 그녀가 추리한 사건과 남편의 외도는 아무런 연관도 없고, 또 우연인 사건들이지만, 사람의 의심은 그것들을 강하게 연결하는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연인 사건들 중 이어질 수 있는, 인과를 지닐 수 있는 사건을 뽑아내어 자신의 의심을 정당화 하는 것. 결국 천명관은 이 소설에서 그런 사람이 사람을 의심하는 것의 순서와 과정을 발견해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질서는 아니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질서를 찾아낸 것이겠지만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을 이정도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천명관의 날카로운 관찰이 느껴진다. 이것저것 마구 주워오는 것 같지만, 그는 자신이 주워오는 것 내부에 숨겨진 질서를 관찰하고 있고 그 질서대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독자들이 흘끗 보기에 그의 소설은 흩어져 있는 동네 어귀의 소문 같을 뿐이다. 질서도 순서도 연관도 없어 보이는, 그런 우연적인 사건들의 마구잡이 나열로 보이는 아줌마들의 뒷담화 속에 있는 것처럼 수많은 이야기가 이리 흐르고, 저리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 뒷담화에 오랫동안 참여해본 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뒷담화마저도 일정한 규칙과 흐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분명히 많은 경험이나, 집요한 관찰이 있어야만 가능한 발견이다.
 
 
 오, 토마스, 미안해요. 제가 처음부터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그래서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논리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죠. 하지만 그게 제 본성인 걸 어쩌겠어요. 풀숲에 숨어 있는 천산갑을 쫓아 아무 데고 겁 없이 뛰어다니다 결국 길을 잃고 마는 철부지 어린 양처럼 말이에요. 그래요. 내 머릿속에선 언제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죠. 당신도 알다시피 그 때문에 나는 자주 엉뚱한 생각에 빠지곤 해요. 그렇지만 어떻게 천산갑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어요? 그 재밌는 동물을 말예요. (p.44)
 
 
 그리고 천명관은 놀랍게도 자신의 소설이 어떻게 보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나 같은 겉읽기 독자에게 천명관의 소설은 위의 인용문과 같았다. 논리적인 사고는 없어 보이고, 사건드른 마구잡이고 뛰어다니는 정신 없는 소설. 그게 천명관의 소설을 본 첫 소감이다. 이제 앞에 말했던 ‘난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재미없다.’를 다시 재고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소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5번 가량을 읽고서 글 자체에 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고 그 논리에 맞춰 글을 썼다. 나는 이 소설집을 ‘잘 빚은 도자기’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도자기에 어떠한 주제도 의미도 없지만 그냥 잘 빚어놓은 걸 보면 기쁘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가, 라고 말했었다. 자 이제 그 말을 번복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그냥 이 소설이 재미가 없어서 별로 잘 빚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놓고 무지하게 재미없었다. 의미도 가치도 별로 없어보였고 그랬기 때문에 뭘 분석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니, 분석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고래」를 할 것을, 이라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민규를 동네 형이라 규정했을 때의 의욕조차 없었던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천명관을 다시 말해보고 싶다. 그는 ‘동네 계모임’에 참여한 ‘아주머니’ 같다.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시작하는데 내용은 사실 별 반 대단할 건 없다. 근데 묘하게 재밌다. 분명히 요상한 이유를 끌어와서 말하는데 그게 나도 평소에 쓰던 방식이라서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추리는 항상 미묘한 수치인 7할 정도로 들어맞는다. 가끔 8할도 있고 6할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아주머니들의 추리는 한 7할 정도 들어맞는다. 천명관의 소설도 그렇다. 7할 정도는 그럴듯하다.
 
 이제 이야기는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지나간다. 그녀는 말한다. 다 내탓이라고.
 
 
 네로의 어머니, 아들과 상피 붙고 남편을 독살한 요부! 그래요. 나 자신도 믿고 싶진 않지만 불행하게도 그 로마의 악녀, 아그리피나가 바로 나의 전생이랍니다. 그녀는 살인을 일삼았고 수많은 부정을 저질렀어요. 그러므로 죗값을 치러야 하는 사람은 당신과 나디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에요. (p.63)
 
 
 보통 의심의 논리가 진행되면 사실 나는 잘했는데 세상이 망조고 네가 나쁜 놈이라서 그렇다는 결론을 내리기 마련이다. 왜 애인이 화를 낼 때도 보통 그러지 않는가. ‘다 네 탓이야!’라고. 그런데 요한나는 이상하게 온갖 이유와 근거를 들어서 남편이 바람을 피웠고, 자기 잘못은 없고 그놈이 다 나빴다라고 말해놓고는 마지막이 되어서는 다 자기 탓이라고 한다. 그것도 전생이라는 묘한 이유를 들어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도 뭔가 익숙한 장면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왠지 이거, 우리 엄마 같다.
 
 젊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우리 엄마가 아버지 욕하다가 내리는 결론이랑 비슷하다. 아, 우리 아버지가 외도를 하신다는 건 아니다. 그냥 평소에 어머니들이 남편을 흉보다가 내리는 결론이랑 비슷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우리 어머니도 비슷하시다. '너희 아버지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문제고 옛날에 이랬고 저랬고, 내가 그러지 말자고 했는데 그렇게 바득바득 우겨서 했더니 망했고 지금 저꼴을 봐라, 내 말만 들었어도 저 고생은 안했는데.‘ 라고 다 말해놓으시고는 마지막에 꼭 이렇게 말하신다.
 
 
 “이게 다 내 팔자지. 내 팔자야. 내 팔자가 센 탓이야.”
 
 
 그 때는 차마 어머니에게 ‘왜 욕은 다 해놓으시고 결론이 그런가요?’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 흐름에 숨겨진 규칙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히 긍정한다.’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 규칙을 어긴다면, 귀싸대기나 욕 한바가지가 날아왔을 거라고 이제야 은근히 추측하지만,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규칙은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 엄마가 정말로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하시는게 아니라는 것을, 그냥 아버지 욕을 하다보니 신세가 한탄스러워서 저런 말을 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왠지 말하다보니까 저런 인간이랑 결혼한 내가 갑자기 한심스럽기도 하고, 가만히 생각하니 완전히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 자기 탓으로 돌리신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어머니의 신세 한탄 법이 요한나에게 정말 맛깔나게 조립된다.
 
 여태까지 의심해서 요상한 결론을 내렸는데, 일단 화를 낼 대상이 없다. 마리사도 없고, 남편도 집에 없다. 브루노는 왠지 자존심 상하니까 제외하자. 소설의 내용을 잘 되새겨보면 파티도 다니시고, 하녀도 있는 걸로 봐서 사모님이다. 동네 반상회 같은 걸 참가하실 분은 아니다. 어디 부녀회를 해도 육성회장을 하실 분이라 하소연할 곳도 없다. 자존심 상하니까. 결국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하소연 하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천명관은 여기서 어머니의 마무리를 넣었다. 살면서 ‘다 내 탓이다.’라는 어머니의 한탄을 안 듣고 자란 자식은 아마 극히 드물 것이기에 우리에게 있어 엄청난 익숙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의 놀라운 점은 결국 ‘내 탓’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탓’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의심을 거둔 것이 아니라, 확실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독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짜로 외도를 한 건가?”
 
 
 이걸 생각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이다. 나를 포함해 아마 적어도 반수의 독자는 확신하고 있다. 토마스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도 요한나의 동생 나디아와 말이다. 그 정도로 나디아의 의심은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보이고, 매우 익숙한 방법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그 생각, 그리고 그 논리, 그 방법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기에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사실을 확신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의심을 할 수 있다는 것, 진행의 이상함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심 많은 독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생각하는 독자는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 생각한다. “안했겠지.” 다 외도를 했다고 믿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가가 그것을 배신하고 외도를 안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거라고 똑똑한 독자는 한수 앞을 짚는다. 설마 그렇게 뻔할려구. 라고 읊조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천명관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오히려 독자가 “에이.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라고 말할 때의 심리를 정확히 예측했다고 까지 보인다. 천명관은 저 말에 숨겨진 질서가 보이는 것일까. 저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황당한 상황과, 가장 당연한 상황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당연해서 가장 황당한 상황 또한 존재한다. 주인공이 빌딩에서 떨어질 때 모든 관객은 이렇게 생각한다.
 
 
 “에이, 설마 죽기야 하겠어?”
 
 
 주인공이 죽으면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도저히 상상도 안 되기 때문에 관객은 내심 저렇게 생각한다. 보통이라면 주인공이 안 죽겠지만, 천명관은 뻔뻔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진짜 죽어버렸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고, 확률도 낮은데 천명관은 진짜로 뻔뻔하게 ‘이상하지? 근데 일어났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확신하던 독자는 ‘역시!’라고 말하게 하고 의심하던 독자는 ‘이럴 수가!’라고 말하게 한다. 분명 ‘이게 뭐야!’라고 화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천명관은 패관잡기 같은 이야기 흐름으로 그 화를 사전에 방지하고 있다. ‘원래 이런 이야긴데?’라고 계속 말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동네 뒷담화에 개연성과 반전을 원하지 않는다. 약속된 결말이 있고 보통 그렇게 되면 외도를 하는 법이다. 아니면? 말고. 그게 동네 이야기의 매력이 아닌가. 그리고 그걸 꼬장꼬장하게 캐물으면 아줌마는 화낸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너무나 당당하지 않은가. 사람을 그렇게 의심해놓고도 아니면 말고, 다. 천명관도 이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아니면 마는데, 일단 맞잖아? 그러니까 계속 들어봐.’ 라고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천명관만의 기법이다. 그리고 이 뻔뻔함은 단타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남편을 외도를 했고, 역시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아내에게 미안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걸로 남편은 그냥 나쁜 놈에서 무지하게 나쁜 놈으로 결정 났다. 그럼 마무리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앞의 요한나의 결론이 누구와 비슷했는지 생각해보면 신기하게 결론이 난다. 그래서 결국 내 탓이라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말하실까.
 
 
 “그럼 엄마 집 나가는 거야?”
 
 
 아마 우리 엄마는 펄쩍 뛰면서 이렇게 대답하실 거다. “나가려면 네 아빠가 나가야지 내가 왜 나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이게 진실이다. 엄마는 자기 탓이라고 했지만, 사실 결국 아빠 탓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요한나도 내심 그랬을 것이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멋지게 술병과 함께 입욕을 하셨지만, 사실 다 토마스 탓이라고 생각하는게 정상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설마?’라고 생각할 때 천명관은 당당하게 “설마가 사실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돔 페리뇽 병이 바꿔치기 되어 정작 토마스가 자살한 것이 되었다. 편지만 없에 버리면, 완전 범죄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과실치사니까 큰 문제는 안 된다. 사람이 죽었는데 왠지 굉장히 편안하고 뒤끝 없는 결말이 되었다. 그리고 독자는 다시 한번 그 뻔뻔함에 혀를 찬다. ‘진짜로 토마스가 죽어버렸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대체 마리사는 뭘까. 그걸 고민할 시점이 왔다. 이야기는 모두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굉장히 익숙한 흐름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름만 요한나에 토마스지 그냥 평범한 우리 엄마, 아빠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사건 진행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름이 요한나이고 토마스이기에 살짝 거리감을 지녔고 우리가 평소에 신경도 쓰지 않던 것을 너무나도 세밀하게 관찰해서, 자연스러워 보이게 치밀한 배치와 이어붙이기를 한 탓에 우리는 익숙함과 어색함을 동시에 느꼈다. 평소에 생각하지 않던 것을 생각하게 되면서 모르던 논리적 비약과 허점이 보이며 낯설게 다가왔지만, 수많은 경험으로 몸에 새겨지다시피 한 논리의 진행은 우리에게 친밀감을 줬다. 그리고 우리는 평소에 이런 생각의 질서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명관의 이야기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아이러니를 품은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익숙한 것을 눈앞에 들이대어 다시 보여줌으로서 우리는 낯섦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으로 소설의 흐름은 설명된다. 그렇다면 마리사는 무엇일까. 요한나가 엄마고 토마스가 아빠, 독자인 내가 자식이라면 마리사는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아마도 내가 앞서서 천명관을 표현할 때 사용한 ‘동네 아주머니’가 바로 마리사의 위치가 아닐까.
 
 이 사건이 천명관이 말하는 식으로 퍼져나간다면 아마도 마리사가 그 말을 해야 제격일 것이다. “저기 저기, 내가 일하는 집 주인어른이 돌아가셨는데 그게 사실,” 이라면서 호들갑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마리사의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그녀가 포르투갈 사람일지라도 아마 동네 아주머니들의 뒷담화 현장은 별 차이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위치는 ‘소문을 퍼뜨리는 동네 아주머니’다. 그리고 그 위치는 천명관의 위치이기도 하다. 결국 마리사는 천명관의 시선을 지닌 인물이고 그녀는 이 소문을 퍼뜨릴 의무도 책임도 없지만, 무조건 퍼뜨리게 될 것이다. 천명관이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쓴 것처럼, 마리사도 분명히 이런 식의 흐름으로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이런 말도 할 게 분명하다.
 
 
 이런! 순서가 또 어긋났군요. 원래 마리사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토마스. 다시 시작할게요. (p.47)
 휴, 이제야 겨우 제대로 길을 들어선 것 같군요. (p.47)
 미안해요, 토마스. 순서가 또 바뀌었군요. (p.4)
 
 
 결국 마리사와 천명관의 이야기는 똑같을 것이다. 요한나의 이야기를 천명관은 자신의 소문처럼 이야기했고, 그가 사용한 것은 마리사 같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뒷담화에 숨어있는 규칙과 질서를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명관의 이야기와 마리사의 이야기도 같은 질서 속에 있다. 보기에는 우연이 겹치고, 사건들이 이리저리 난삽하게 뛰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분명히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흐른다. 마치 정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소양강 처녀’의 ‘슬피우는 두견새야’ 구절을 부를 때 모두가 ‘새야 새야, 새야 새야 새야’를 추임새를 넣어주는 암묵적인 규칙처럼 이 소문의 전파에도 모두 규칙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천명관은 이 규칙을 눈치 챘고,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소설들에 우연들 사이에 있는 규칙을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모든 규칙들을 자신은 모르고, 그냥 이야기를 했을 뿐이라는 것처럼 당당하게 거짓말을 한다.
 
 
 그런 건 소설에나 등장하는 일이지 현실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죠. (p.53)
 
 
 그리고 뻔뻔하게 ‘그런 걸’ 들이댄다. ‘거의 안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로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천명관은 우연들을 보이지 않는, 자신만이 알아차린,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던 그 일들을 뻔뻔스럽게 꺼내어 온다. 그리고 ‘썰’을 풀기 시작한다.  너무나 익숙했던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천명관은 익숙하지 않게 만든다. 결국 그의 소설은 규칙과 질서가 감춰져있었을 뿐 치밀한 계산 속으로 이뤄져 있었다. 뒷담화와 썰을 그는 소설로 만들기 위해 뭐하나 빼먹을 수가 없었고 진짜보다 저 진짜같은 가짜를 만드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움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계산하고 배치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진짜 뒷담화와 썰보다 더 그럴 듯 해졌다. 그는 이야기를 소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설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하다. 그는 가장 썰같은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을 정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모든 썰에서 기대하는 것이 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모두가 바라고 있지만,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모두가 포기하고 있던 그런 일이, 그의 소설 안에서는 정말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기분은 뻔 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야기꾼도 사람이다. 결국 천명관도 저 말을 하면서 입꼬리가 실룩거리고 있을 것이다. 유쾌하니까.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게 웃기고 재밌으니까. 그렇게 이 단편집은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 것들로 가득하다. 아, 내가 앞에서 이야기했던가? 마리사는 곧 천명관이라고? 결국 책 제목은 굉장히 그럴듯해졌다. 결국 이 소설집에 있는 썰들을 풀면서 천명관은 굉장히 유쾌했던 것이다. “어떠냐? 재밌지 않냐? 정말 그렇다니까?” 라고 계속 속으로 질문하면서 천명관은 유쾌하게 썰을 풀어낸다. 아마도 입으로 썰을 푸는 사람은 많아도, 소설로 구라가 아닌 썰을 푸는 작가는 천명관이 유일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서 천명관은 굉장한 특별함을 지닌다. 이 소설은,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