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The 얼음나무숲, 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강력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하지은이라는 이름을 판타지 커뮤니티에 새로운 롤
모델로 등극시킨 그 전설(?)의 작품 '얼음나무 숲'이다. 노블레스 클럽이라는 하나의 런칭 브랜드의 #.1 작품으로 잡았을 정도니
이 것에 걸고 있는 편집부의 기대도 가히 상상히 된다. 그야말로 엄청나겠지.
자, 그럼 서설은 집어치우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이 책은 과연 재미있는가?
난 이 책을 보고 이런 단어를 던지고 싶다.
"오버 더 호라이즌?"
자,
난 이걸로 이영도와 하지은을 붙였다. 싸우는건 팬들의 몫이니 팬이 아닌 나는 잠깐 빠지겠다. 호로비치니 뭐니 하는건 일단 전부
피아노 이야기고, 나는 그런거 안 봐서 모르겠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바이올린을 주력으로 하는 서브 컬쳐물은 오직 저거 뿐이다.
대부분 피아노를 이야기하니까 말이다.
내 마음
속에는 '바이올린을 잘 켜는 사람은 모두 싸가지가 없다.'라는 편견이 있다. 그리고 그건 약 7할의 확률로 들어맞으며, 이
소설에서도 잘 들어맞았다. 주인공이 바옐이라고 칠 때, 주인공은 참 싸가지가 없다. 어떤 사람은 고요가 주인공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고요는 관찰자이고 초점은 바옐에 맞춰저 있다고 하고 싶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해줘야 하는 사람이 바로 주인공 아닐까. 그래서 내
생각은 그렇다. 고요는 내적 서술자이고, 초점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바옐이다. 트리스탄? 그건 조연.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 소설의 외적 서술자는 고요를 함께 바라보고 있다. 아니, 물리적으로 장소는 고요가 있는 곳만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초점이 교차된다고 할 수 있다. A-B-A-B로 이어지는 초점화는 결국 이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헷갈리게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주인공은 고요다. 한걸음 더 들어가면, 바옐이 주인공이 된다. 다시 한걸음, 고요가 주인공이 된다. 이 파고듬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앞의 말과 다른 말을 하겠다. 외적 서술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은 고요다.
흔하디 흔한 음악 이야기지만, 누구도 이 소재를 재밌게 쓰지 못했다. 음악에 큰 조예가 없이 음악에 대해서 쓴다는 것이 부담감으로
작용했는지, 아니면 너무 고상한 음악을 판타지라는 흥미 위주의 장르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존의
판타지에서 음악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심 소재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 그나마 꼽아보자면 '노래는 마법이 되어' 정도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 소설도 음악이라기보다는 '마법 능력을 지닌 음유술사'가 소재였지만. 그렇기에 이 '얼음나무 숲'은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상투적이지만, 기존에 사용하지 않던 소재. 그리고 새로운 브랜드 런칭의 플랙쉽 상품. 거기다가 한국 판타지계에서 흔히
행해지지 않는 단권 장편 소설의 상징적 시작. 모두 이 소설에서 알 수 있는 외적 요소들이다.
다행이 이 요소들은 잘 적중했고, 하지은은 유명해졌으며 '얼음나무 숲'은 수많은 팬층을 거느리게 되며, 당당하게 남들에게 추천하는
가장 흔한 책이 되었다. 그러니까 6쇄나 찍었겠지. 나는 이 작가의 '모래선혈'을 읽었고 이 작가가 가진 재능이 굉장히 부럽다.
그녀는 솜씨좋은 글재주를 지녔고 그것을 풀어낼 끈기도 있다. 분명히 좋은 작가다. 하지만 나는 '모래선혈' 보다 '얼음나무 숲'이
좋다고 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나는 '모래선혈'이 더 좋으니까.
마무리가 약하다. '모래선혈'에서 볼 수 있었던 모든 내용을 작가가 가지고 통제하던 그 날카로운 섬세함이 '얼음나무 숲'에서는 볼 수
없었다. 내용은 중후반까지도 마치 2권을 암시하듯이 흘러갔지만, 마지막에 들어 갑작스러운 결말을 내버렸다. 키세는 그렇게 짧게
논해질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글은 고요에 집중하며 키세와 트리스탄을 버렸다. 개인적으로 트리스탄은 알 바 없고, 키세의
비중이 뭔가 애매모호한게 이상하다. 초/중/후반 모두 비중이 적잖은데, 어떻게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을까.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는 부분이다.
모든 인물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던 후작과는 다르게 이 글에서는 아직 작가의 미숙함이 느껴진다. 결국 이 사소한 차이는 사건의 얼개조차 약하게 만들었고, 약해진
사건은 소설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작가 자신이 너무나도 큰 기대를 받고 있기에, 미세한 차이는 결국 큰 균열처럼 보이게
되고 나는 이 글을 탐탁찮게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그곳에서 찾는다.
자,
그러면 이제 이 책의 제목인 '얼음나무 숲'을 생각해봐야겠다. 왜 제목은 얼음나무 숲인가. 얼음나무 숲이 나오니까, 라고 말하면
너무 멋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옐이 추구하는 음악이 얼음나무 숲에 있었으니까, 라고 하는 것은 로망이 없다. 과정이 결과에
묻혀버리는건 진짜로 딱딱하지 않은가. 나는 고요가 얼음나무 숲이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은 '얼음나무 숲'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바옐이 말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네가 나의 얼음나무 숲이 되어달라고. 얼음나무 숲은 분명히 주인공이지만, 바라보는 것이다.
고요도 그렇다. 자기 스스로도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지만 그는 바옐을 바라보는 것을 원했다. 단 하나의 청중.
바옐의 음악이 얼음나무 숲을 깨웠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얼음나무 숲이야말로 바옐의 단 하나의 청중이라고 믿고 싶다. 악마인
뭐시기 귀족도 단지 이해하고 있다는 이유로 바옐의 청중이 되었는데 숲이라고 못 될게 뭐냐. 그의 음악을 이해하였으니, 그러니 그의
음악에 반주를 맞춰 소리를 따라가주는 얼음나무 숲이야 말로 최초로 바옐의 음악을 들어주는 청중이다. 솔리스트를 받쳐주는 반주는
진심으로 솔리스트의 음악을 이해할 때 가장 완벽해진다. 결국 고요는 바옐의 음악을 느끼고 있었다.
새하얗게 불타버려서 오히려 얼음처럼 보이는 하얀 숲의 나무처럼 너무나 위대한 피아니스트여서 바옐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던 고요의 그 절규는, 그야말로 얼음나무 숲처럼 모순된 세계였다.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였고, 결국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버린 자의 슬픈 기억. 그리고 단 하나의 청중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아버린 단 하나의 청중. 고요야 말로 진정으로 얼음나무
숲이었다.
그리고 바옐은, 자신의 청중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연주할 뿐, 단 하나의 청중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결국 고요는, 단 하나의 청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한장에 적힌 고요의 전기같은 것은 넘겨두겠다. 그것은 기록일 뿐이고, 타인의 관찰일 뿐이다. 나는 바옐과 고요
사이에 진실로 관계가 맺어졌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의 분량과 조절이 아쉽다. 책은 허망하게 끝이 났고, 독자는 끝이 되어서야 그걸 눈치챈다. 책은 숨을
너무 빨리 내쉬어 버렸다. 결국 독자는 바다 중간에 둥둥 떠오르게 되버렸다. 섬은 설핏 보일 뿐, 닿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인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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