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칸맨
- 저자
- 레나 크론 지음
- 출판사
- 골든에이지(Golden Age) | 2009-09-14 출간
- 카테고리
- 소설
- 책소개
- 핀란드 국민작가 레나 크론의 대표작 핀란드 문학서평의회 [안니 ...
대체 이걸 왜 펠리칸맨이라 한 건지 대충 이해는 된다. 원제가 너무 노골적인 거 같으니까. '인간의 옷 속에서 - 도시 이야기' 뭐
대충 이런 의미를 지닌 제목인데, 이런 제목을 쓰면 사실상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외면에 치중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와
도매금으로 싸잡아 넘어갈 확률이 너무 높다. 그래서 아마 제목을 '펠리칸맨'이라고 했을 터이다. 적어도 이 소설은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감각 기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의 7할은 시각이 담당한다고 한다. 그만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보이느냐에 큰 영향을 받고, 보이는 것을 가장 신뢰한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결고 10할이 아니고,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과 본질은 보는 것만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을 결정짓는 것은 결코 보이는 부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 존재하는 5감의 영역 외에 있는 어떠한 것을 우리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보이지 않는
사각(死角)이자, 인간이 처(處)하는 장소가 된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오감을 넘어건 지각을 위해 배우고 자신의 세계를 만든다. 모든 개체가 개별의 세계를 지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마도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도 인간은 보여진다. 우린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인간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은 많고, 흔하고, 별로 재미도 없다. 너무 뻔한 말을 해서 따분하다. 그래,
우리가 눈으로 사람을 보는게 뭐 어떻단 말이냐. 세상은 어차피 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본질을 보는 것? 그런 말은 널리고
널렸잖아? 어떻게 말하는지는 매우 중요하지만 어차피 번역된 마당에 과연 여기에 레나 크룬의 어법이 얼마나 녹아있을까. 애매해진다.
하지만 이 책은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왜 거지같은가에 대한 대답을. 인간은 왜 고통받는가.에 대한 대답이 있다. 허생이
말한 것과 똑같다. 인간은 알기 때문에 분란을 만들고 돈이 있기에 욕심이 생기며 종교가 있기에 편을 가르게 된다. 그러니 우린
완전한 무지성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장자가 말하고 노자가 말했던 어떤 것에도 얽메이지 않는 그런 세계로 떠나야 한다. 우리가
배우는 이유는 아무 것도 알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리라.
자연은 영원을 살아간다. 자연 속에 있는 동물도
자연이고, 인간도 사실 자연이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하고 오로지 신만이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동경하고
추구한다. 그런데 과연 동물은 진정 유한한 것일까? 우리가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하게 되면 그것은 유한해진다. 내가 이름을 붙여준
개는 죽었고, NGO가 이름 붙여준 사자도 코끼리도 치타도 하이에나도 코뿔소도 물소도 다 죽었다. 하지만 개는 살아있다. 사자도
살아있고 코끼리도 치타도 하이에나도 살아있다. 코뿔소와 물소는 오늘도 달리고 있다. 자연은 죽지 않고 영속한다. 그것은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고 이름 붙이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다면
영속할 수 있을 것이지만 우리에겐 지식이 있어서 죽을 수 밖에 없다. 자연은 자신과 남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하루가 영원히 이어지고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내가 사라진다면 나는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알기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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