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저 표지 아닌데...? 뭐, 다음 탓이겠지요. 표지 바꿔라 다음. 사소한 건 여기까지 말하고 바로 본편을 넘어가겠습니다.
굉장히 올드한 제목이군요. 이 제목을 듣고 아 그 책? 이라고 반문하는
분들은 이미 낡은 오르골이나 다름없습니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나 흘러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이 책이 굉장히 유명했고 어느 정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저는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읽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홍정훈 팬이고 임경배를 높이 사며 전민희를 읽던, 그러니까 방지나의 책이 공백을
가지고 있을 때 열심히 판타지 읽던 사람이라는 소리죠. 제가 다니던 대여점에는 방지나 책이 없었어요. 그런데 무슨 수로 읽습니까.
한국장르판타지를 평가함에 있어서 많은 분들은 시대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장르판타지가 시대성을 가지기에는 너무
짧은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었겠죠. 하지만 이제 판타지는 출판서적으로만 쳐도 그 역사가 25년 정도 되었습니다. 강산이 2번 반
정도 바뀌었네요. 그러니 우리는 시대성을 말할 수 있는 지점에 서 있는 겁니다. 예전 분들은 안 그렇다구요? 그 때는 너무
얕았습니다. 한국장르판타지라는 것이 너무 얕았어요. 이제 깊어지는 시기라 지금도 얕지만 그래도 이제는 뭐라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시기입니다. 혼란한 시기기도 하구요.
지금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매우 흔한, 안티-클리셰 작품입니다. 클리셰가 너무 견고해서 안티-클리셰가 나왔지만 이제 그것도 흔해진
시절입니다. 꽤 전통적인 장르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안티-클리세인 작품은 이 작품이 나름 3손가락 안에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초창기 한국장르판타지에서 대충 기억이 나는 걸 꼽아봐도 대부분이 안티-클리셰 작품들이었던 것 같지만, 1998년을
기준으로 볼 때는 이 작품이 유일했습니다. 대신 1999년도는 안티-클리셰의 잔치였죠. 전통적인 영웅담의 형태를 가지는 작품도
많았지만, 그러한 클리셰를 부정하는 작품들도 많았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말해서 주인공이 '착하지 않은' 작품들도 많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이 '정의의 편은 아닌' 작품도 많았구요.
개인적으로는 『카르세아린』, 『비상하는 매』가 그런 부류라고 생각하고, 『데로드&데블랑』도 아르카이제의 존재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전통적인 영웅담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자면 아무르타트가 절대 악이 아닌 『드래곤
라자』 또한 그러한 흐름에 어느 정도 발을 걸치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연재일을 기준으로 하기에는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결국
1998년도에 나온 이 방지나의 『마왕의 육아일기』는 최초의 안티-클리셰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현재는 말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작품의 시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뭐가되건, 최초 아닙니까? 그리고 이 작품이 출간되었다는 점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점을 시사 합니다.
1. 용사-마왕이라는 클리셰는 당시 10-20대에게 충분히 인지되고 있었다.
2. 용사-마왕 클리셰를 지겨워할 정도의 높은 수준의 매니아층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지만, 논리는 '나의 당연함 또한 당연히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니 이 부분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거는
단순합니다. 이러한 안티-클리셰가 성립하려면 우선 클리셰에 지루함, 혹은 익숙함을 느끼는 독자가 많다고 작가가 판단해야 합니다.
특히 초창기 한국장르판타지 작가군은 대부분 글에 취미가 있는 10-20대의 일반인이었기에 창작층=수용층의 도식이 어느 정도는
성립하게 됩니다. 즉 수용층에도 발을 걸치고 있는 창작층에서 이러한 소재를 택할 정도로 수용층에는 클리셰가 인지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이러한 안티-클리셰로 구성된 '출판 작품'을 출간한다는 것은 이것을 소비할 '매니아층'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997년 IMF의 영향으로 대여점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작품이 난립하지 않던 시기인지라 결국 대중의 수요-구매 혹은 대여-가 있을 거라고 출판사에서 판단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서 또 하나의 당연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한국장르판타지는 이식문학이다.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한국장르판타지는 '한국문학'의 계보에 있는 문학이 아니라 '국외문학'의 계보의 연장선상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듭니다. 당시 한국장르판타지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미즈노 료의
『로도스도 전기』 입니다. 물론 『마술사 오펜』이나 『슬레이어즈』, 『델피니아 연대기』도 영향을 줬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일단 큰
범주의 영향력은 저 2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두 작품 모두 '절대 악'에 대항하여 주인공이 영웅적 과업을 달성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은 익히 알려진 대로 영웅에 대한 안티-클리셰적 작품입니다. 영웅이 아닌 자가 영웅적이지 않은 행보를 통해
영웅의 과업을 달성하는 매우 특이한 작품이죠. 그리고 『마왕의 육아일기』에서 사용한 마왕과 용사라는 단어를 볼 때 역시 영향을
받은 작품은 일본 쪽의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게임과 함께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이는 결국 한국장르판타지는 당시에
존재하는 한국문학이나 한국문화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기원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과도기 없이 완성된, 혹은
시행착오가 대부분 끝난 상태로 '도입'하여 시작부터 완성품을 즐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한다면 해당 장르의 필연성이
매우 희박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한국장르판타지는 기원이 약할 수밖에 없고, 이는 장르의 성숙도가 장르의 문제점과 시간적으로 심한 괴리가 발생하는 원인이 됩니다.
대중문학에 속한 장르는 시간이 갈수록 다종다량의 작품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작품의 평균적인 질은 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작품이 많아지면서 피라미드가 점점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독자와 작가는 장르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질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점에 대응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한국장르판타지는 장르의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장르를 이식하여
즐기는 형태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첫 질문부터가 굉장히 난해하고, 오랜 시간을 요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질문은 아마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무엇이 한국적인 판타지인가?"
이러한 질문이 본격적으로 던져진 것은 임의적으로 구별할 때, 00년 이후인 2세대 판타지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을 기준으로
한다면 라니안, 라다가스트, 레드드래곤, 삼룡넷 같은 개별 홈페이지 기반 연재 시절에 이러한 논의가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1999년을 기점으로 판타지 출간이 본격화되며 많은 독자층이 유입되었기도 했구요. 그렇기 때문에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은 1999년의 판타지에까지는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단서, 혹은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시하는 작품은 대부분 작품성과 무관하게 강력한 시대성을 보유하게 되어 그 이름이 매우 길게 남습니다. 대표적으로 『퇴마록』,
『바람의 마도사』, 『귀환병 이야기』, 『드래곤 라자』, 『가즈나이트』 등이 있겠습니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퇴마록』은 소재적인 부분으로 답합니다. 한국적 소재를 쓰면 한국적 판타지가 아닌가라는 매우 간결하면서 강한
설득력을 던집니다. 『바람의 마도사』는 있던 것을 모두 망라하여 잘 정리하면 그것은 곧 새로운 것이 되며, 이 새로운 것이 처음
탄생한 곳이 한국이라면 한국적 판타지라 할 수 있다는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귀환병 이야기』는 이미 한국화 된 무협지의 클리셰를 잘
변용·차용하여 새로운 장르에 이식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한국적 판타지라 할 수 있다는 형태를 가집니다. 이 부분은 조금 설명이
필요해서 부연하자면, 사용한 주요 요소가 이미 한국적이라면, 그것을 이식하는데 성공한 새 장르도 한국적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드래곤 라자』는 조금 난해한데요, 서술법과 주제가 매우 통념적 인문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Raja라는
것 자체가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주술사의 형태와 유사하다는 2가지 특징이 한국적 판타지와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됩니다. 즉
교과서나 기존 순문학에서 흔히 다뤄지는 소재와 작법을 사용했고 내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인 Raja가 한국적인 소재를 기초로
하여 재조립된 소재라는 점에서 한국적인 판타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가즈나이트』는 opposition에 대해 한국적 재해석이
가미되어 있다고 판단되어 단순 소재보다는 좀 더 큰 틀에서 관습의 한국화를 시도했다는 점이 한국적 판타지에 대한 답변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왕의 육아일기』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해답을 제시하거나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시대를 뚫고 나아가는 힘이 상대적으로 떨어집니다. 즉
현재 시점에서도 추억처럼 '그런 책이 있었지' 혹은 '그 때 그게 재미가 있었지'라고 언급되는 작품이며 향후 20년 내로 특별한
전환점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잊히는 그런 작품이라는 의미지요. 냉정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재 회자되거나 기억되는
이유는 아마도 읽어본 사람들은 옛 기억이라 미화가 되어서 그렇고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은 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아마 그렇지
않겠어, 라는 자세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냉정히 말해서 한국장르판타지에서 손꼽힌다는 평이 자자한 『드래곤 라자』도 지금 읽어보면
저질스럽습니다. 문학성? 문학성을 문장 예술성에 국한한다면 『드래곤 라자』도 문학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하지만 여타 부분들이
빈약한 문학성을 보충하고도 남기 때문에 작품은 이 분야에서 아마 영원히 회자가 될 겁니다.
결국 『마왕의 육아일기』는 시대가 던진 질문인 '한국적 판타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의미며,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거나 주목받지 않는 이상 도태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렇게 큰 흠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장르판타지는 이식문학이며, 그 기원 자체가
한국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 작품은 본격적인 안티-클리셰 작품으로는 의의가 있습니다. 작품이 출간되던 시대의 시대상과
향유층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작품인 것이죠. 시대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시대를 반영하고 있고 세월에 밀려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부분이 아쉽게 느껴지는, 하지만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그 때'의 좋은 작품입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괜찮은 게임 팬픽과도 같은 느낌을 줍니다. 현재 게임판타지로 지칭되는 유형들이 말하는 게임 대부분은
'MMORPG'를 차용하고 있지만 사실 1990년대의 게임은 역시 패키지를 기반으로 하는 싱글플레이 기반의 RPG로 대표됩니다.
『마왕의 육아일기』는 그러한 완성된 RPG 게임을 지면을 통해 만나는 기분을 줍니다. 그것도 이미 끝낸 게임의 에필로그 같은
기분을 말이죠. KOEI社의 삼국지 게임을 즐긴 분들은 아시겠지만, 삼국지는 천하통일을 하는 것을 엔딩 조건으로 삼지만 천하통일을
한 뒤에 반드시 '에필로그'와 같은 뒷이야기를 짧게 전달합니다. 저는 항상 반란으로 나라가 분열되고 천하가 다시 혼란으로
빠져드는 그런 뒷맛 씁쓸한 결말이었죠. 이 작품도 그러합니다. 용사가 마왕을 물리친 뒤, 우리는 새로운 속편을 만납니다. 용사는
괴로워하고 마왕도 괴롭고, 새로운 마왕이 나타나서 또 모두를 괴롭히고, 제작사와 플레이어는 마치 신처럼 용사와 마왕과 새로운
용사와 새로운 마왕과 그 동료와 뭐 어찌되건 여기 있는 모두를 자기 마음대로 괴롭히고 조종하면서 일희일비를 시키며 즐거워하고
괴로워합니다.
『마왕의 육아일기』지만 우리는
마왕도 용사도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마제사와 연금술사에 더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독자는 철저한
방관자의 입장에 놓이게 되고 이는 작품에 거리감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 거리감은 어떠한 인물에도 감정이입하여 대리만족할 수 없는
상태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변화시킵니다. 독자는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라도 조금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이것은
책의 내용을 산뜻하고, 가볍게 변화시킵니다. 사건은 굉장히 심각하고, 모두는 고통 받으며 주인공은 무책임하면서 따박따박 헛소리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 내적 상황에 독자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거리감으로 인해 몰입(flow)이 적당히 억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작중 장치는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완성되어 있습니다. 남의 일처럼 누군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고, 독자는 작품에 깊숙히
관여하지만 작중의 모든 사건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습니다. 불새와 같이요. 처음부터 3자의 시선을 부여받고 작중의 내레이션을
통해 시점은 전지적인 시점이 됩니다. 독자는 '이입'하지 않고 '관찰'하게 됩니다.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는 위치를 고수할
때, 이 책은 유쾌한 이야기가 됩니다. 어찌되건 모두가 행복해지고, 어색하지만 정의는 지켜집니다.
판타지 작품에 있어 프롤로그는 이러한 장치입니다. 프롤로그의 가장 큰 효과는 독자와 작품의 위치를 정하고, 그 거리를 말해주는 것에
있습니다. 판타지라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방법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독자가 정하는 위치와 거리는
천차만별입니다. 누군가는 인물에 자신을 대입하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사건에 몰입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냉정하게 사건을
분석하고 있을 수도 있고 완벽하게 방관자의 입장에서, 혹은 불신의 자세로 작품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마왕의 육아일기』는 그
점에서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작품과의 거리와 독자의 자세를 부여합니다. 독자들은 프롤로그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거리에 서서 비슷한 자세로 작품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로써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작품을 오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독자의 반응과 작품 수용 상태는 큰 편차 없이 고르게 분포됩니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을 남도 감동받고, 남이 재밌었던
부분을 나도 재밌었다. 더 크게 나아가 보면 다시 처음 논의로 돌아갑니다.
매니아층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시점에서 그 매니아의 한 명이 작가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비슷한 '사람'에게 비슷한 '결과'를 선사합니다. 결국 한 명의 매니아인 작가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대부분의 매니아들은
작가와 비슷하게 '재밌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충분히 그 시절에 회자되고,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을만한 조건입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시간은 지나갑니다. 우리는 그 때의 매니아와 다르고 점점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변합니다. 작품은 점점 힘을 잃고 세월에 밀려 색이 바래고 닳아 없어질 것입니다.
좋은 작품이라 선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0년의 세월이 필요합니다. 1990년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왕의 육아일기』는 좋은
작품이다"고. 2000년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왕의 육아일기』는 좋은 작품이었다"고. 2010년대는 이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마왕의 육아일기』라는 좋은 작품이 있었다"고. 그리고 2020년이 되면 " " 아무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을 되씹어봅니다.
"아직도 좋은 한국장르판타지는 지금 무엇이냐?"
뭘까요,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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