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독서

소네자키 숲의 정사, 감상.

UVRT 2015. 3. 15. 00:50



소네자키 숲의 정사(일본명작총서 2)

저자
지카마쓰 몬자에몬 지음
출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07-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랑과 죽음은 문학의 영원한 테마이다. 18세기 초 오사카 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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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情死)라는 걸 일단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라는 게 문제인데 과연 그딴 걸 먼저 적는게 내 감상문이려나 싶다. 한없이 불친절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 감상문이 바로 내 감상문의 정체 아니었나? 자, 하지만 어차피 이 책은 현재 국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소네자키신쥬의 번역본. 그러니 단어를 설명하긴 해야 할 것 같다. 이것도 제멋대로니 좋은 감상문이 나올턱이 있나.

상대사(相對死), 정사(情死). 뭐 대충 이렇게 번역이 되는 신쥬(心中)는 간단하게 말하면 '애정관계에 의한 동반 자살' 정도로 이해하면 간단하다. 죽는 순서는 뭐 크게 상관이 없는데 따라 죽어도 어느정도 신쥬로 보는 것 같긴 하다. 문제는 일본은 이러한 '따라 죽음'을 순사(殉死)라고 해서 또 나름 분류를 하는데 그런 자세한 내용은 본인이 일본문학이나 일본문화에 깊은 관심이 있으셔서 알아보실 때 차이점을 아시면 될 것 같고 현재 일본에서 신쥬란 애정에 기반을 둔, 을 넘어서 '동반 자살'에 대한 일반 명사로 쓰인다, 정도로 인식해야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강제로 죽이고 자신도 죽는 경우도 '억지'신쥬라고 하고 인터넷으로 연락하여 집단 자살하는 경우도 Net신쥬, 뭐 이렇게 지칭하니까. 일단 같이 죽어야 하고 일본 문학사에서 신쥬 문학이라고 한다면 애정 기반의 동반 자살. 굳이 비유해야 한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결말이 나야 한다... 라고 이해하면 된다. 한국 고전 문학에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런 거 없다.

본책은 지카마쓰 몬자에몬이 쓴 소네자키신쥬의 다케모토 기다유본이다. 1703년도의 조루리본이지만 서문에도 있다시피 당대의 유명한 다유와 원작자가 협의한 내용이니 이 내용이 가장 원전에 가깝거나 혹은 원전과 비슷한 수준의 권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품 이후 이어지는 최관의 소네자키신쥬에 대한 해설은 꽤나 귀중한 자료다. 우선 국내에 소네자키신쥬에 대한 작품론이나 해설이 많이 없는 것이 첫째 이유고, 국내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일본의 자료에도 소네자키신쥬에 대한 자료가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 신쥬에 대한 것은 많은 일본문학 연구서에서도 꾸준히 언급되지만 매우 독특한 감성체계를 가진 신쥬 문화에 대해서 작품과 연관하기는 아무래도 힘든 부분이 있다.

원론적이고 개괄적인 내용 측면에 있어 이 책은 큰 도움이 되며 마지막에 실린 원문 또한 하나의 자료에 궁색한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어를 할 수 없지만 소네자키신쥬에 관심이 있다면, 당신이 연구자가 아니라면, 당신이 단지 일본의 고전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신쥬라는 것이 궁금하다면 일단 이 책이다. 그러기 위한 충분한 설명과 소개와 자료가 망라되어 있다. 얇지만 중요하다.

자, 이제 책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고 감상문이나 써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뭐 말했는지 안 했는지는 확인 안해봤고. 이야기가 삶과 다른 이유는 시작, 중간, 끝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삶은 오로지 중간의 연속이며 시작도 끝도 없다. '인간'혹은 '나'의 시작이 언제인지는 사실 알 수 없다. '나 다운 게 뭔데?'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나이대를 보면 10대부터 30대까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으며, 가끔 60대 이상에서도 발견된다. 즉, '나'라는 것이 대체 언제 확정되는지는 인간에게 있어 오로지 의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시작을 모른다. 사실 시작을 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시작 없는 연속선상의 무한한 중간에 위치해 있다는 건 확실하다. 나는 지금 연속선상에 서 있고, 이는 무한한 찰나의 반복이다. 앞선 시간이 뒤 따라오는 시간의 시작이 될 지언정, 나의 시작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영원한 중간 속에 존재한다.

이처럼 결국 처음-중간-끝을 고민하면 개소리로 결론나기 마련이다. 저게 무슨 소린가 대체. 저런 거 고민할 시간에 잠이나 더 자고 인터넷이나 한 번 더 뒤지는게 좋지 않는가. 물론 그런 부분보다 이런 거 고민하는게 좋으니 이런 글이나 쓰고 앉았다. 그래, 나는 지금 이 활자의 이어짐 속에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일단 차치하자. 스피노자가 말한 사과나무를 심을 수준의 물체를 인간이라고 지칭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하질 않았나, '超'인 이라고. 그리고 철학자들은 대부분 동의는 한 것 같다. 끝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었고, 살아가는 것도 선택할 수 없지만 그래, 끝은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살을 택하는 분들의 자주성에 박수를. 당신의 삶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가진 유일한 선택인 끝을 스스로 정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낸다. 자살이 옳고 그른지는 모르겠고 당신이 스스로 선택을 했다면 나는 그것을 존중하고 싶다. 세상에 밀려서 죽었다고? 그건 자살이 아니잖아. 선택한게 아니라 선택 당한 거니 그건 자살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간접적 타살이라 부르고 싶지만 우리는 사실만 볼 뿐 진실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자살은 별 수 없이 자살로 귀결된다. 자, 이제 끝에 대한 이야기도 대충 마무리된 것 같다. 이 글자들은 이야기라 끝이 있다. 끝을 향해 가자. 난 스스로 끝을 선택할 의지가 부족하기에 무수한 이야기를 짓는다. 난 끝을 내가 선택해보고 싶다.

일본의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끝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 이야기는 처음 중간 끝이라고 했다. 모두가 동등한 비중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오로지 중간에만 집착하는가. 처음을 알 수 없는 삶에서 끝은 중간과 동등한 가치를 지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일본은 그런 것 같다. 어떻게?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의 무게를 어디까지 봐야 하는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동등한 삶을 지녔다. 그것이 수십년에 걸쳐 쌓은 것이든, 찰나에 걸쳐 만든 것이든. 일단 한국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죽음의 순간을 지금까지의 삶 전체와 동등하게 저울질 할 수 있다니. 어느정도 죽음에 무게를 꽤 높이 달아주는 것이 동양이지만, 일본만큼은 아니다.

신쥬. 이것은 결국 사랑의 끝을 논하는 방법이자, 사랑의 한 방법이다. 이 사람의 사랑하는 이 순간이, 이 사랑 자체가 지금까지의 삶과 앞으로의 삶, 모두와 동등하다는 항변이다. 왜 살아서, 라는 말 따윈 필요치 않다. 앞으로의 모든 삶을 이 사람을 사랑하며 살 거라면, 왜 같이 죽질 못하겠는가. 어차피 당신의 사랑 외에 내가 필요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면 죽어도 괜찮잖나. 이게 바로, 신쥬다. 죽으면 모든게 끝이라고? 그러니까 죽어야지. 죽음은 삶을 박제시킨다. 지금까지 내가 살던 것을 그대로, 내가 지금 생각한 나의 삶을 그대로 보존한다.

역사가 나를 심판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평가는 바뀔 수 있겠다. 내 죽음이 얼마나 하찮고 위대할지는 역사가 판단할 수 있다. 내 사랑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대하고 충동적이고 존귀한지 후대는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결코 식지 않았다는 것은 변치 않는다. 사랑하기에 죽었다. 사랑하는 그 순간에 삶은 끝이 났고, 사랑한다는 사실, 사랑하고 있다는 진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랑에 대해 왈가왈부 당할 지언정 사랑은 부정당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신쥬의 가치이고, 내가 생각하는 신쥬의 논리다.

사랑이 영원하려면, 사랑할 때 끝을 내야 한다. 영원히 행복하고 싶다면 그 순간에 끝을 내라. 왜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지 당신도 알 거다. 바로 행복한 그 순간,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삶 속에 영원을 불어넣을 수 있다. 영원히 살 수 없지만 영원히 행복하고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슬플 수 있다.

이것은 영원히 사랑한 두 사람의 이야기. 끝이 났기에 변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