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독서

폭우, 감상.

UVRT 2014. 5. 3. 07:00


폭우(메피스토(Mephisto) 4)

저자
카렌 두베 지음
출판사
책세상(도) | 2002-09-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카렌 두베 장편소설. 성공하지 못한 작가 레온 울브리히는 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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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를 직역한 '비의 소설'도 괜찮지만, 폭우라는 이 제목도 꽤 괜찮다. 느낌이 약간 다르지만 둘 다 소설의 분위기나 내용을 잘 살려준다.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가?'라는 내용을 가진 소설을 읽어보면 대부분 절대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소설은 있을 법직한 이야기'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소설은 있을 법직하다. 다행이 과학이 완벽하지 않아서 판타지 소설들도 있을 법직하다. 「폭우」는 판타지가 아니고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다. 사실 이런 삶, 굉장히 흔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개같다고 말해도 결국 치안은 세계 10위권 안에 반드시 들어가고 경제 규모도 20위권에 들어간다. 내가 미국에 태어난들 화이트 트래쉬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내가 스웨덴에 태어나도 나라 좆같다고 생각하고 쿨하게 투신이나 할지도 모른다. 난 대한민국에서 생존에 대한 걱정은 해본 적이 없다. 난 중산층도 아니고, 꽤 높은 확률로 중상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내게 현실이니 아픔이니 같은 소리를 하는데 굳이 그걸 체험할 필요가 있나? 소말리아의 고통을 위해 일단 너도 ak-47을 몇 발 맞아보자는 소리하고 앉았네.

구동독 지역, 주인공은 꽤나 가난한 것 같고 여주인공도 꽤나 맛은 간 것 같다. 삶이 쓰레기 같아 보이긴 한데 모두의 삶에는 저정도의 개같음이 녹아있다. 멀쩡한 가정도 없고 화목한 가정도 없다. 멀쩡해 보이는 가정과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 있을 뿐. 내 삶의 내부에도 저정도의 개같음은 어느정도 있을 것이다. 그게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느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느냐, 아니면 계속 현상을 유지하느냐라는 단순한 분기에 의해 지금 내 삶과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착하다는 건 뭘까. 전 세계에서 딱 1명, 구원을 받아야 한다면 누가 될지는 몰라도 일단 내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할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타고 있다면 그 안에서 같이 버닝 댄스 파티를 벌이고 있지 마누라와 딸 둘을 끌고 탈출하고 있지는 않았을 거다. 삶과 인생에는 끝도 없이 쓰레기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나한테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모두의 삶은 쓰레기더미에 휩쓸려 일렁이고 있다. 그걸 밖에서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이런 의미에서 유유상종은 굉장히 옳은 말이다. 인간의 삶이 모두 개쓰레기 같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친해져서 찬찬히 내밀한 이야기를 나눠보면 나나 얘나 꼬라지 비슷하다. 누구를 만나도 친해지고 나면 서로의 삶에 드리워진 그늘과 쏟아지는 폭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도, 나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다. 봄에는 황사가 불고 여름에는 돌아버릴 장마철이 온다. 가을에는 항상 농사꾼들이 울상이고 겨울은 미치도록 춥거나 눈 때문에 망할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이라 봄에는 꽃놀이를 가고 여름에는 피서를 가고 햇볕을 사랑하며 가을에는 뭐라도 처먹고 즐겁다. 겨울에는 그 눈을 가지고 처 놀고 앉았다. 삶도 그렇다. 모두가 개쓰레기 위에 둥둥 떠 있지만, 적어도 가라앉아버리거나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안다. 삶이 이렇게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는 어찌되건 살아가고 있고 대부분 그러고 살아가고 있다. 삶에 그늘이 드러워진 사람은 9할9푼 정도 될 것이고, 비가 내리는 사람은 8할6푼 정도 될 것이다.

소설은 희망차지 않다. 다만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과 그것이 작금이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 현실이 바로 우리의 것이라는 것은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이 소설을 보고 우울해지는 이유는 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눈치채기 때문이다. 내 삶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